• [강찬호 논설위원이 간다] “시행 10년된 사전투표, 국민 입장 물을 때”

     ━  총선 논란들에 입 연 김용빈 선관위 사무총장   강찬호 논설위원 “사전투표의 투표율이 본 투표에 맞먹는 수준이 되다 보니 본말이 전도될 위험성이 있어 보인다. 금년중 국민에게 사전투표에 대한 입장을 물어보는 조사를 하겠다.”   4·10 총선이 끝났다. ‘부정선거’ 논란에 대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투개표의 공정성을 강화하는 조치를 몇 가지 했다. 사전투표함의 이동 과정과 보관 장소를 CCTV로 24시간 공개하고 수검표를 도입하는 한편 신분증 스캔 자료를 총선 후 30일까지 보관키로 했다. 그럼에도 투표함 봉인이 훼손되고 규격을 벗어난 투표지가 발견되는 등 논란을 부를 사안들이 발생했다. 총선 관리를 총지휘한 김용빈(65) 선관위 사무총장의 해명을 들어봤다. 그는 “사전투표의 성격이 당초 취지와 달리 본 투표처럼 되고 있어 국민 총의를 물어 개선책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했다.     ■  「 “사전투표로 선거 반은 끝나…취지 맞는건지 검토할 때” “봉인지 훼손, 규격 다른 투표지 등 논란, 문제 없었다” “투표소에선 정치적 표현 자유 없어…대파 금지 당연” “민주당에 일제 샴푸·초밥도 안 된다하니 아무 말 안 해” 」    김용빈 은평구 선관위에서 심야에 선관위원 2명이 투표함 봉인을 뜯고 투표지를 투입하는 모습이 공개돼 논란을 불렀는데.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에서 추천한 선관위원들이 사전투표일 이전에 관외 투표함을 검사해 빈 상태임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보증하기 위해 봉인을 미리 붙여놓았다. 이어 사전투표가 끝나면, 은평구처럼 각 지역의 선관위에 도착한 관외 투표지들을 선관위원들이 해당 투표함에 넣고, 본 투표가 끝날 때까지 보관한다. 그러려면 투표함 봉인을 뜯어야 할 것 아닌가. 여야 추천 선관위원들이 함께 봉인을 뜯은 뒤 함에 사전투표지들을 넣는 장면이 영상으로 공개된 것뿐이다. 일각에서 사전투표자 수가 부풀려졌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스캔한 신분증 파일 수와 실제 발급된 투표지 수를 전수 대조한 결과 일치함을 확인했다.”   구미·홍성 등에서 봉인이 해제된 투표함이 발견됐다. “사전투표용 관내 투표함과 본 투표용 투표함 규격이 다르다. 관내 투표가 많아 관내 투표함이 더 크다. 그 함의 뚜껑을 본 투표용 투표함에 쓴 경우가 있는데, 운반 과정에서 함이 흔들리면서 뚜껑과 본체 사이 이격이 생겨 봉인지가 다소 풀어진 거다. 정당 참관인과 후보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문제없이 끝났다.”   대구 남구에서 세로가 3㎝ 더 긴 투표지가 발견됐다. “투표지는 롤 용지를 출력하는 건데 커팅값이 입력돼있다. 간혹 롤러가 잘 안 돌아 힘을 줘 당기는 과정에서 다소 길게 출력된 듯하다. 후보 한 분이 이의를 제기해 합의로 무효 처리했다. 기술적인 결함이 있는지 조사해 보완할 생각이다.”   지난 10일 저녁 서울 관악구 서울대 종합체육관에 설치된 4·10 총선 개표소에서 수검표가 진행되는 모습. 선관위는 부정선거 논란을 종식하기 위해 이번 총선에 수검표 도입과 사전투표함 보관 장소 24시간 CCTV 공개 등 투개표의 공정성을 강화하는 조치들을 실시했다. [연합뉴스] 사전투표는 법률상 투표관리관이 투표지에 일일이 날인하게 돼 있지만, 선관위는 관인이 미리 인쇄된 투표지를 쓰는 기존 방식을 고수했다. “고민 많이 했다. 법적으론 관리관 날인 방식이 맞지만, 현실적으론 특별한 효과가 없는 반면 투표시간 지연 등의 문제가 야기될 것으로 봤다. 투표지 발급기가 투표소마다 최소 7대에서 최대 17대에 달하는 만큼 관리관 도장도 7~17개를 파야 한다. 관리관 한명이 인영이 다른 도장 7~17개를 관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역삼동 같은 혼잡 투표소는 점심시간에 유권자들이 몰려 투표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분들도 있었다. 관리관 날인을 도입하면 혼잡이 가중돼 난리가 나리란 내 생각이 맞았다.”   부정선거론자들은 사전투표의 신뢰성을 가장 문제 삼는데. “사전투표와 관련한 여론조사 결과 ‘찬성’이 70%였지만 ‘수검표 찬성’도 70%로 집계됐다. 사전투표를 지지하지만, 신뢰성 확보도 필요하다는 게 여론 같다. 내 생각인데 사전투표제는 본 투표일에 투표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한 보충적인 제도다. 그런데 보충적 기능을 넘어  이번 총선에서 보듯 사전투표율(31.28%)이 본 투표율(35.32%)에 맞먹어, 사실상 본 투표 기능을 한다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사전투표하는 순간 절반은 선거가 끝난 것 아니냐. 원칙과 예외가 전도돼있다. 이런 기형적인 제도는 아니지 않느냐고 반성적 주장을 하는 전문가들도 많아졌다. 이렇게 문제가 있지만, 결국 제도란 국민이 어떻게 바라보는 지가 중요하니 국민의 총의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마침 올해가 시행 10주년이다. 다음 달 선관위의 ‘3차 유권자 의식 조사’에서 사전투표에 대한 국민 입장을 묻는 조사를 하고 전문가 공청회도 연 뒤 종합적인 의견을 낼 계획이다.”   모바일 웹 조사 방식으로 진행된 끝에 여당에 유리한 결과가 나온 한 총선 여론조사에 대해 선관위 산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여심위)가 공표 중단을 요구해 논란이 됐다. “조사 방식이나 결과를 문제 삼아 공표 중단을 요구한 건 전혀 아니다. 다만 데이터의 진실성을 증명할 자료를 제출토록 했는데 업체에서 준 자료가 부실해 추가 자료를 요구한 것뿐이다. 예를 들어 문제의 조사는 서울 강서구를 대상으로 패널(조사군)을 잡았는데 강서의 선거구는 갑·을·병 3곳 아닌가. 강서 갑을 조사한다면 을과 병에 사는 패널들은 포함되면 안 되는데 문제의 조사는 그렇게 세밀하게 구분이 돼 있지 않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문제는 끝까지 사실 여부를 따질 생각이다.”   총선 여론조사의 불공정 논란이 많다. 첫 질문을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로 시작하는 조사도 있었다고 한다. “선관위의 규제대상은 선거 여론조사지 정치 여론조사는 아니다. 정치 여론조사는 총선 기간에도 대통령 관련 질문을 할 수 있다. 다만 총선 여론조사를 하면서 대통령 관련 질문을 하면 유권자가 헷갈린 답변을 할 우려가 생기는 등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 총선을 앞두고 민생 토론회를 연 데 대해 선관위원장이 우려 성명을 내지 않은 것도 논란인데. “그런 성명을 내려면 중앙선관위원 9명의 의결이 필요한데, 위원회에서 의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유 토론 과정에서 안건에 올리지 않기로 정리됐기 때문이다.”   양문석 민주당 안산갑 후보가 서초구 아파트를 매입가보다 낮은 공시가격으로 축소 신고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경찰에 고발했는데. “위법이 명백해 고발하고 투표소에 그 사실을 공고한 것이다. 8억원 대출금 기록을 누락한 혐의로 국민의힘 장진영 후보 역시 고발 등 같은 조치를 했음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명백한 위법은 여야 안 가리고 다 고발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투표소 대파 반입을 금지한 조치도 논란이 됐는데. “‘대파 들고 투표장 가도 되느냐’는 유권자 문의가 들어와 검토한 끝에 ‘투표소에선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없다’는 판단 아래 반입 금지를 결정한 거다. 직원들이 ‘전국적으로 대파 들고 투표소 찾는 이들이 있을 듯하니 통일된 지침을 주지 않으면 현장 관리관들이 헷갈릴 수 있다’고 해 그런 지침을 하달했다. 이게 언론에 새 나가자 민주당 조정식·박주민·김영호·김영배 의원 등이 방문해 항의하며 ‘본 투표 때도 (대파 반입) 막을 거냐’고 묻길래 언성을 좀 높였다. ‘당연하죠. 투표소에서 절대 정치적 표현 행위는 안 됩니다. 일제 샴푸·초밥, 이런 거 절대 안됩니다’고 하니 아무 말씀들 안 하시더라.”   전임 사무총장·차장 경질을 부른 특혜채용을 일소할 방안은. “선관위 조직이 작다. 시군구 위원회는 7~9명에 불과하고 선거 때 집중적으로 함께 근무하는 데다 인사 범위도 근교 지역에 한정되다 보니 정실이 개입되기 쉬운 구조더라. 그래서 적어도 사무관 이상 직원들은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인사하는 걸 상례화하고 (인사 비리) 징계도 다소 약했던 측면이 있는 듯해 강화할 생각이다.”   특혜채용 등 비리가 잇따라 불거지며 감사원이 감사에 나서자 선관위는 ‘부당하다’며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제기했는데 사무총장 부임 직후 ‘헌재가 선관위 편을 들어줄 것’이라 말해 논란이 됐다. “선관위가 감사원, 즉 행정부의 통제를 받는 순간 헌법기관에서 행정기관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헌재는 감사원의 선관위 감사는 안된다고 결정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6월 안에 결정이 나올 것으로 본다.”   그럼 비리 의혹을 어떻게 감사할 것인가. “감사관을 외부 개방직으로 개편했다. 지난 1월 1일 자로 판사 출신 임정수 변호사가 취임했다. 감사위원회 역시 전원 외부 인사로 구성했고, 사무처 소속이던 감사과를 위원회 직속으로 독립시켰다. 감사 실무 직원들도 따로 뽑을 수 있도록 관련 예산과 적정 인원을 정부에 요구할 방침이다.”     강찬호 논설위원

    2024.04.23 00:43

  • [주정완 논설위원이 간다] 늦게 핀 사과꽃의 희소식, 올해 사과 생산량 늘어난다

     ━  ‘30년 사과 외길’ 이동혁 국립원예원 사과연구센터장   주정완 논설위원 지난 16일 대구 군위군 소보면의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사과연구센터. 과수시험장에 줄지어 서 있는 사과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꽃잎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46년 전 국내 최초의 사과 신품종으로 개발한 홍로의 꽃이다. 국내 사과 생산량 2위 품종인 홍로는 매년 9월 초·중순에 나오는 중생종으로 ‘추석 사과’로도 불린다.   이곳에선 여전히 국내에서 가장 많이 생산·소비되는 사과 품종인 후지(富士·부사)도 재배하고 있다. 후지 품종의 사과나무에선 드문드문 꽃망울만 보일 뿐 꽃잎이 별로 피지 않았다. 후지는 홍로보다 수확 시기가 늦은 편이다.     ■  「 작년 사과 생산, 12년 만에 최악 올해는 50만t 수준 회복 기대감   “기후변화로 국산 사과 사라진다? 극단적 가정의 과장된 시나리오”   “스마트 과수원으로 생산성 제고 5명이 닷새 할 일 2시간에 끝내” 」    기자를 안내한 이동혁 사과연구센터장은 “올해는 후지를 기준으로 꽃이 피는 시점이 지난해보다 닷새 정도 늦어졌다. 닷새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사과 재배와 생산량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봄에 사과꽃이 늦게 필수록 꽃샘추위 등으로 냉해가 발생할 걱정이 줄어든다. 올해 사과 생산량은 지난해보다 확실히 많아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봄철 꽃샘추위가 가을 사과 작황 좌우   지난 16일 대구시 군위군의 사과연구센터 과수시험장에서 이동혁 센터장이 홍로 품종의 사과꽃을 소개하며 미소를 짓고 있다. 주정완 기자 지난해 사과 농사는 12년 만에 최악의 흉작이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사과 생산량은 39만4000t으로 2011년 이후 가장 적었다. 2022년(56만6000t)과 비교하면 17만2000t(30%)이 감소했다. 생산량 급감은 사과값 급등으로 이어졌고 장바구니 물가를 전반적으로 끌어올리는 ‘애플플레이션’(애플+인플레이션)이란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지난해는 일시적인 기상 악화로 인한 매우 예외적인 한 해였다고 사과연구센터는 보고 있다. 봄철엔 심한 일교차와 꽃샘추위로 사과꽃이 많이 상했고, 여름철엔 잦은 비로 병충해와 낙과 피해가 컸다는 설명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지난 1월 발표한 ‘농업전망 2024’에서 올해 사과 생산량이 예년 수준인 연간 50만t을 회복할 것으로 내다봤다.   사과 재배면적은 꾸준한 증가세   이동혁 센터장은 1994년 농촌진흥청 사과연구소(사과연구센터의 전신)에 들어가 30년간 연구직으로 근무해왔다. 2020년부터는 4년째 센터장을 맡고 있다. 이 센터장은 “1990년대 사과연구소에서 선제적으로 신기술을 개발해 국내 사과밭 모양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과거엔 일본 책을 보고 사과 재배법을 배웠지만 2000년대 들어선 기술적인 면에서 일본을 한참 앞섰다”고 말했다. 그는 “농촌 인구 고령화와 기후변화 등을 고려해 다시 한번 산업적 구조 개편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 센터장과의 일문일답.   지난해 사과 작황이 매우 안 좋았다. 원인이 뭔가. “봄철 냉해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사과꽃은 예년보다 빨리 피었는데 일교차가 심해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그러면 사과꽃의 암술과 수술이 다 죽어버리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지난해 여름엔 병해충 피해도 심했고 수확기에 강풍이나 폭우로 인한 낙과 피해도 컸다. 대략 10년에 한 번씩 이런 일이 생기곤 한다. 그만큼 이례적인 경우였다.”   올해는 상황이 어떤가. “올해는 시작부터 긍정적이다. 꽃 피는 시기도 지난해보다 다소 늦어졌다. 과거 수십 년 사례를 봐도 2년 연속으로 흉작이 반복되는 일은 없었다. 오는 6월 말이나 7월 초에 극조생종 사과가 나오면 시장에서 공급 부족이 상당히 해소될 것으로 본다.”   꽃 피는 시기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다. 내가 처음 연구소에 발령받은 1994년에는 후지 품종의 사과꽃이 4월 23일에 피었다. 그게 점점 빨라지더니 지난해는 4월 11일 무렵에 피었다. 우리나라 봄철 기온의 특성상 4월에도 꽃샘추위가 찾아올 수 있다. 병해충은 관리를 잘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는데 봄에 꽃이 떨어지면 대책이 없다. 그래서 사과연구센터에선 꽃이 늦게 피는 품종을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국내에서 사과 농사 자체가 어려워진 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사과 재배면적은 해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2000년대 들어선 중장기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해 전국의 사과 재배면적은 3만3800㏊였다. 2022년보다는 다소 줄었지만 2020년보다는 늘어난 규모다. 1990년대는 사과 재배면적이 지금보다 넓었지만 생산성은 낮았다. 이후 나무 사이 간격을 좁히는 밀식재배와 기계화 등으로 생산성을 크게 높였다.”   기후변화에도 빨간 사과 생산 가능   국립원예원 온난화대응농업연구소는 2년 전 사과에 대한 충격적인 자료를 공개한 적이 있다.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따라 사과 등 주요 과일의 재배지 변동을 예측한 결과다. 연구소는 2070년에는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사과를 재배할 수 있고, 2090년에는 국내에서 경제성 있는 사과 재배지(재배 적지)가 사실상 사라지는 것으로 전망했다. 당시에는 ‘사과 소멸 시나리오’라는 말까지 나왔다.   정말 국산 사과가 사라지는 건가. “기후변화에서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 시나리오다. 실제로 그렇게 되진 않을 것으로 본다. 꼭 재배 적지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사과를 생산할 수 있다. 다만 소비자가 선호하는 새빨갛고 예쁜 사과를 생산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사과연구센터에선 햇빛이나 기온에 상관없이 유전적으로 빨간색을 내는 사과 품종도 개발했다. 강원도 홍천군을 중심으로 전국에 보급 중인 ‘컬러플’(컬러+애플)이란 품종이다.”   사과 재배지가 점점 북상한다고 하는데.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과민 반응할 필요도 없다. 과거에도 지금도 사과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지역은 경북이다. 다만 대구에서 가까운 경북 경산 일원에서 경북 북부로 사과의 주생산지가 옮겨가긴 했다. 경남(2위)과 충북(3위)·전북(4위) 등에서도 여전히 많은 사과를 생산한다.”   밀식재배·기계화로 농가 일손 절감   그럼 기후변화의 영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나. “평균 기온이 올라가면 사과 색깔이 덜 빨갛게 나오긴 한다. 수확기 온도가 섭씨 18도를 유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예쁜 빨간색이 나온다. 맛에는 큰 차이가 없어도 빨간 사과가 시장에서 더 비싼 가격에 팔린다. 그래서 기후변화에도 안정적으로 좋은 품질의 사과를 생산할 수 있게 신기술을 개발했다. 내년부터 농가에 보급할 예정인 스마트 과수원이다.”   스마트 과수원은 어떤 건가. “사과연구센터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술이다. 사과나무의 간격을 1~1.2m로 좁히는 초밀식재배에 성공했다. 기존 사과나무의 간격은 2.5~3m였다. 이렇게 하면 기계화·자동화가 쉬워지기 때문에 농가 일손을 획기적으로 덜 수 있다. 기존에 가지치기를 할 때 1만㎡(약 3000평) 기준으로 다섯 명이 닷새 정도 걸렸다. 이걸 기계로 하면 2시간 만에 끝낼 수 있다. 생산성이 비교가 안 된다.”   농가에는 어떻게 보급할 계획인가. “내년에 다섯 곳(100㏊)을 시작으로 점차 늘려나가려고 한다. 농가에서 스마트 과수원을 하려면 기존 사과나무를 베어내야 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바꾸긴 어렵다. 농림축산식품부의 ‘과수산업 경쟁력 제고 대책’에 따르면 2030년 기준 스마트 과수원 60곳(1200㏊)을 조성할 계획이다.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송미령 농식품부 장관도 직접 사과연구센터에 와서 현장을 보고 갔다.”     ■ 한국 사과 120년, 홍로·감홍 등 신품종 활발 「 현대 한국 사과의 역사는 1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대구 동산병원의 전신)을 설립한 선교사들이 1900년 무렵 미국에서 사과 등 과일나무를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반도의 남쪽에서 대구가 사과 재배의 주산지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이다. 북한 지역에서 사과 재배는 대구보다 다소 앞선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전에 『삼국유사』 등에도 야생종 사과(능금)가 나오지만 현대 사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동혁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사과연구센터장은 “삼국시대에 있던 능금은 ‘말루스 아시아티카’라는 학명의 열매”라며 “16~17세기 중국에서 모래처럼 과육이 부서지는 품종이 들어오면서 모래 사(沙)자를 써서 사과라고 했다”고 전했다.   국내 최초로 산업적 의미의 사과 과수원을 시작한 곳도 대구였다. 1904년 무렵 일본인 과수업자가 일본에서 사과 묘목을 들여와 국광 등을 재배했다고 한다. 이후 1970년대 일본에서 신품종인 후지(富士)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홍옥과 국광이 국산 사과의 주종을 이뤘다.   현재 국산 사과의 1위 품종은 후지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사과 재배면적에서 후지의 비중은 66.1%였다. 2위는 1978년 신품종으로 개발한 홍로(13.9%)가 차지했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의 전신인 원예시험장에서 선보인 품종으로 맛도 좋고 저장성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홍로는 1980년대 후반 농가에 보급한 뒤 재배 면적이 빠르게 늘었다.   고당도 품종인 감홍(2.5%)은 비교적 비싼 가격에도 경북 문경을 중심으로 생산량이 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 품종의 여름 사과인 쓰가루(아오리)를 대체하는 국산 품종인 썸머킹도 재배면적이 늘어나는 추세다. 」 주정완 논설위원

    2024.04.18 00:34

  • 시효 오늘까진데...끝내 소송 못 한 ‘안인득 사건’ 피해자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강주안 논설위원 〈포항과 진주의 판이한 국가배상소송 지원〉   5년 전인 2019년 4월 17일 새벽 경남 진주에서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다. 안인득(당시 42세)씨가 아파트에 불을 지른 뒤 대피하는 이웃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5명을 살해하고 17명을 다치게 했다. 세월호 참사 5주기 추모식 다음 날 전해진 비보에 국민은 충격을 받았다.   직후 이웃의 증언을 통해 안씨의 조현병 증세가 뚜렷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에 여러 차례 신고했으나 부실 대응 탓에 참극을 막지 못했다. 가족을 잃은 A씨가 의사와 변호사 등의 도움을 받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11월 15일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 A씨 가족에게 약 4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  「 법원, 경찰 부실 대응에 “국가가 피해자 가족에게 4억원 배상” 판결 공식 피해자 22명 외 주민 정신적 피해 심각하나 대부분 시기 놓쳐 포항선 시청 등 전방위 홍보전에 지진 피해자 50만 명 소송에 동참 ‘치매 보듬 마을’ 주민도 90% 이상 참여…승소 땐 1조원 넘게 배상 」  다음날인 11월 16일. 이번엔 경북 포항에서 국가가 지진 피해자 4만 7000여 명에게 200만~300만원씩 배상하라는 대구지법 포항지원의 판결이 나왔다. 하루 차이로 진주와 포항에서 국가의 책임을 묻는 판결이 나왔지만, 이후 두 도시에서 전개된 상황은 판이했다. 지난 1월 포항시 소속 공무원들은 경로당과 어르신 행복쉼터를 다니며 지진 피해 소송을 적극적으로 안내했다. 그 결과 50만 명 이상이 소송에 참여했다. [사진 포항시청] 지난 8일 오전 10시쯤 경북 포항의 포항지원 인근 공봉학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공 변호사는 2017년 11월 15일과 2018년 2월 11일 포항에서 발생한 지진 피해자들의 소송을 주도했다. 그의 사무실엔 10만 명 넘는 포항 시민들이 보내온 소송 관련 서류가 가득했다. 변호사 사무실 공간이 모자라 인근 건물의 사무실 두 곳에도 관련 서류를 보관 중이다.    ━  포항 인구보다 많은 소송 참여자   포항시청이 추산한 소송 참여 시민은 약 50만 2000명에 이른다. 지난달 기준 포항 인구 49만2342명보다 많다. 지진 발생 시점보다 포항 인구가 줄었기 때문이다. “지진 당시 인구의 96% 정도가 소송에 참여했다”고 시청 측은 밝혔다. 시청을 중심으로 지역 국회의원들과 법조인 등 각계에서 독려한 결과다. 이 소송의 시효는 지난달 20일로 끝났다. 정부조사연구단이 지열발전소로 인해 지진이 촉발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날이 2019년 3월 20일이었기 때문이다. 1심 판결 이후 4개월밖에 시간이 없었지만, 총력 홍보전이 먹혔다. 시청 청사에 ‘포항 촉발 지진 2월 말까지 손해배상 소송 참여하세요!’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걸었다. SNS와 방송을 통해 홍보하는 한편 시청 통화연결음으로도 알렸다. 시청 공무원들은 ‘2월 말까지 손해배상소송 참여하세요’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다녔다. 넉 달 만에 50만 명이 소송 서류를 냈다. 이들의 피해가 인정되면 보상액은 1조원이 넘을 전망이다.   포항 일대를 다니던 중 ‘치매 보듬마을’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이 많아 치매 예방 활동 등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동네라는 설명이다. 이곳 주민도 소송에 참여했을까. 마을이 속한 흥해읍 관계자는 “지난 2월 파악했을 때 해당 마을 주민 177명 중 90% 정도인 약 160명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국가 배상 판결이 나온 경남 진주의 상황은 크게 다르다. 피해자 가족 상당수가 소송을 안 냈다. 시효는 오히려 진주가 더 길어서 사건 발생일로부터 5년이 되는 16일까지 소송이 가능하다. 그러나 진주시청과 법률구조공단 및 1심 소송을 진행한 ‘법과 치유’ 오지원 변호사 등에게 확인한 결과 소송을 낸 시민은 다섯 가족 정도로 파악됐다. 안씨에게 직접 살해당하거나 상처를 입은 피해자만 22명이었으니 극히 일부만 참여한 셈이다. 공식 피해자 집계에 빠진 주민 상당수도 후유증이 심각하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눈앞에서 이웃이 흉기에 찔려 숨져가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평생 정신적 상처에 시달린다고 한다. 사건 이후 LH에서 이사비 등을 지원한 피해자 숫자만 78가구에 이른다. 문제는 저소득 고령자가 많은 임대아파트 특성상 피해자 대다수가 법원 판결과 배상 가능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1심 판결 한 달 뒤인 지난해 12월 22일 사고가 난 아파트를 돌아봤으나 배상 판결 및 피해 구제 사실을 알리는 현수막이나 게시물을 찾을 수 없었다.  ━  진주 피해자 일부만 소송 제기   언론에서 국가배상청구권의 소멸 시점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잇따르자 진주시청은 지난달 20일부터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시효가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이었다. 안씨에게 살해당하거나 상처를 입은 22명의 가족이 대상이었을 뿐, LH가 지원한 78가구 피해자 등 당시 주민 대다수는 통보 대상에서 제외됐다.   참극이 벌어지기 전 주민 신고에 안이하게 대처한 경찰의 잘못은 명백하다. 이때만 제대로 조치했으면 주민들을 살리고 안씨도 치료가 가능했던 상황이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최근 발간한 책에서 “소송 과정에서 가해자가 된 조현병 환자(안씨)의 의무 기록을 볼 수 있었다. 치료를 받았던 2016년까지 그가 얼마나 호전됐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이 이 비극의 안타까움을 더했다”고 밝혔다. (『처음 만나는 정신과 의사』) 더욱이 진주 사건의 경우 국가가 항소를 포기해 배상 판결이 확정됐다. 피해자가 소송만 제기하면 승소 가능성이 크다.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은 판결 직후 피해자 가족에게 ‘선생님 가족분들 생각하면 아득하고 죄송스럽습니다’라고 손편지까지 보냈다.  ━  국가 항소 포기에 한동훈 사과 손편지   안인득 사건과 포항 지진 피해자를 모두 진료했던 이영렬 전 포항지진트라우마센터장에게 두 사건에 관해 물었다. 이 전 센터장은 포항 시민의 충격이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했다고 설명한다. 450명 정도를 직접 상담한 그는 “첫 지진은 처음 경험한 강진(규모 5.4)이라서 충격이 컸고, 겨우 안정을 찾을 때쯤 두 번째 지진(규모 4.6)이 터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코로나19 사태까지 닥치면서 심리적 공포감이 극심해졌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두 명의 자살 사례를 접한 그는 심리 상담을 진행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사안이 “자살을 막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포항지진 피해자 소송을 주도한 공봉학 변호사와 이영렬 전 포항지진트라우마센터장, 안인득 사건의 피해자 소송을 도운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왼쪽부터) 강주안 기자 그가 국립부곡병원장일 때 발생한 진주 사건에 대해선 “주민들의 정신적 충격은 포항 지진 피해자보다 훨씬 심했으며 해당 아파트 거주자 모두가 트라우마를 받았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상담을 할 때 끔찍했던 피 냄새에 대한 기억, 죽어가던 피해자가 피 묻은 손으로 다른 집 벨을 누르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모습에 대한 충격을 호소했다”고 말했다.    ━  법조계 “무료 변론” 뜻 물거품   절박한 상황에 각계에서 지원 의사를 전해왔다.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최원혁 변호사는 “무료로 피해자 소송을 돕겠다”고 했다. 그러나 시일이 촉박한 데다 피해자들을 접촉할 방법이 없어 시간만 흘렀다. 지난달부터 피해자에게 시효 만료 안내를 시작한 진주시청 측은 “관련 내용을 피해자 22명의 가족에게 알렸고 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도록 안내했다”고 말했다.   트라우마가 심한 피해자들을 법정으로 이끌려면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첫 소송 당사자인 A씨도 의학·법조계·시민단체 전문가들이 꾸준히 지원했다. 그러나 이젠 시간이 없다. 이상훈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피해자들이 시효가 지나 배상을 못 받게 되는 점은 안타깝지만, 소송해 보기 전에는 그 사람이 요건이 충족되는 피해자인 것은 맞는지,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확정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지급한다면 정부의 지출 행위는 항상 법률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법치 행정의 원칙과 안 맞을 수 있다”면서 “현 시스템에서는 공무원이나 법률구조공단이 도와주거나 시민단체가 나서는 정도이며,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도 가능한 방안”이라고 말했다. -----------------------  ━  “일상이 붕괴된 피해자 보호 미흡해”   '법과 치유' 오지원 변호사.   안인득씨 사건 피해자 A 씨의 소송을 이끈 오지원 변호사(사진)는 15일 “범죄피해자 보호법에 중요한 권리들이 빠져 있어 벌어지는 문제”라고 말했다.   -1심 승소 이후 추가로 도움을 요청한 피해자가 있나. “한 가족 다섯 명이 소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피해자는 더 많지 않나. “공식 피해자 22명의 가족만 해도 훨씬 많을 거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나.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피해자 법률지원 등이 여전히 부족하다. 가령 일본은 재난 피해자에 대해 민·형사는 물론 행정·이혼 사건까지 법률 지원을 해준다. 이런 피해로 일상이 붕괴하기 때문이다.” -16일에라도 소송 의뢰가 가능한가. “쉽지는 않겠으나 관련 서류는 저희가 갖고 있으니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떼 오신다면 노력은 해보겠다.”   관련기사 기껏 아파트 잘랐는데…공항 옆 고도 초과 장애물 3647곳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너무 높게 지은 아파트 위쪽 싹둑 자른다는데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언제 어디서 칼부림 나도 이상할 것 없는 현실”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한동훈과 이재명의 앞날[강주안의 시시각각] 대리운전 지옥 만든 만취청년 '아침 콜'…쥔 돈은 1만6천원 뿐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강주안 논설위원

    2024.04.16 00:34

  •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DJ라면 북한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고 대화 모색했을 것"

     ━  라종일 석좌교수가 보는 대북 및 외교·안보 전략   장세정 논설위원 남북 사이에 비상시 핫라인 역할을 해온 판문점 연락사무소 전화와 동해·서해 지구 군 통신선을 지난해 4월 6일 북한이 일방적으로 차단한 지 꼭 1년이 지났다. 정전협정 체제 유지·관리 임무를 맡은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 사이에 24시간 전화 채널이 있다지만, 우발적인 군사 충돌 방지는 물론이고 북방한계선(NLL) 주변 해상 표류 선박 구조 등 인도주의적 목적과 재난 대응을 위해서도 핫라인 재개가 시급하다.  하지만 북한은 대한민국을 향해 시간이 갈수록 적대적 언행을 쏟아내고 있다. 실제로 북한은 4·10 총선을 앞두고 지난 2일 신형 중장거리 고체연료 극초음속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로 도발을 이어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모든 미사일을 고체연료화·핵무기화했다"며 미사일 체계 완성을 선언했다. 특히 김 위원장이 올 초에 남북한 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함에 따라 당분간 남북 관계 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우세한 상황이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가 지난 2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북한의 대남 전략 변화와 윤석열 정부의 4강 외교 전략 등을 주제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라종일(84) 동국대 석좌교수는 김대중(DJ)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해외·북한 담당 차장과 주영 대사를, 노무현 정부에서는 대통령 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과 주일 대사를 역임한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다. 서울대 정치학과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국제정치학 박사)을 나온 뒤 경희대에서 20여년 교수로 재직했다. 『세계와 한국전쟁』,『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물과 피』 등 단행본 저술과 강연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그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만나 남북 관계 등 한반도를 둘러싼 민감한 국내외 이슈에 대한 원로의 고견을 들었다.      ■  「 북, 사정 어려우니 '두 국가' 선언 '전쟁 도발'보다 '전쟁 불사' 의도 충돌 피하도록 상황 관리해야 '명분보다 실리' 균형외교 필요 」  DJ, 핵 실험에도 햇볕정책 유효하다 생각  -DJ라면 '두 국가론'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북한의 대남 성명 자체보다 이런 선언이 나오게 된 북한 내외부의 현실을 살펴볼 것 같다. 이런 상황에 일차원적 반응을 하기보다 '햇볕정책'의 관점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했을 것이다. DJ라면 김정은 위원장에게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으면서 대화·교류하는 길을 모색했을 것 같다."  -북한의 핵 개발로 햇볕정책은 이미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는데.    "한계도 있었지만 가장 합리적인 정책이었고 초기에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물론 약점도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햇볕 정책을 세습 체제 유지에만 이용하려 했고, 북한 체제와 주민에게 미치는 햇볕 정책의 영향을 최대한 차단하려 했다. 무엇보다 햇볕 정책을 이용해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2000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첫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무위원장이 서로 손을 잡은 모습. 김 전 대통령은 끝까지 햇볕정책의 유효성을 믿었다고 한다. [연합뉴스]  -DJ는 끝까지 햇볕정책의 유효성을 믿었나.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한 다음 날 DJ의 급한 전화를 받고 동교동 자택에서 단둘이 식사했다. DJ에게 앞으로 햇볕정책 수행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DJ는 북한의 핵실험에도, 어쩌면 핵실험 때문에 더욱더 햇볕정책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DJ라면 아마 지금도 교류·협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확신할 것 같다."  -북한의 '두 국가론'에 숨은 의도는.  "분단 이후 남북 관계를 돌아보면 한쪽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는 교류·협력을 주장하고, 그 반대 상황에서는 폐쇄적·위협적으로 나왔다. 김정은의 두 국가론과 무력 통일론도 이런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북한의 사정이 그만큼 나쁜 것 같다. 강대국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 첨예화하는 국제 정세도 유념해야 한다. 북한은 향후 한반도를 계속 첨예한 신냉전 구도로 몰고 가면서 기회가 되면 미국과 직접 협상해 남한을 고립시키고 북한 내부 이완을 차단하려 할 것이다. 동시에 압도적인 핵 무력 우위를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주한미군은 어떤 경우에도 유지 필요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김정은의 강경한 도발 언사와 남한에 대한 비난을 살펴보면 일각에서 제기되는 '전쟁 도발론'이라기보다는 '전쟁 불사론'에 더 가깝다. 평화를 지키는 군사적 억지력은 필수다. 정부는 김정은의 일방적 선언에 직접 대응하기보다는 대결·충돌로 악화하지 않도록 남북 관계 관리에 더 유념하길 권한다." 김정은, 신형 중장거리 고체탄도미사일 '화성포-16나' 현지지도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 발표 30주년을 맞아 통일부가 새로운 통일 구상을 준비 중이다.  "지금 상황에선 획기적인 통일 방안을 제시하는 것에 앞서 남북한은 같은 민족이고 같은 하늘 아래 한 울타리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원망(願望)을 강조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남북이 다른 민족이고 영구 분단된 두 국가라고 하면 주변 강대국들만 편해지고 좋아할 것이다."  -트럼프가 당선해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꺼내면.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쉽게 동의하거나 우리가 먼저 철수를 요구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있으면 안 된다. DJ는 동북아를 둘러싼 강대국의 독특한 관계 때문에 남북 통일 이후에도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지도자는 핵 무장 선택지도 유념해야 한다. 물론 핵 무장에 앞서 핵잠수함과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로 군사적으로 대북 억지력을 조용히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과 러시아와는 어떤 외교가 필요한가.  "내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니 1998년에 발표한 역사적인 '김대중-오부치 선언'에 이어 21세기에 한·일 양국이 함께 수행해야 할 세계적 비전과 실천 청사진을 담은 '새로운 공동 문서'가 나오길 기대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한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북한은 러시아에 무기를 판매하는 식의 경직된 냉전 구도가 조성되는 것은 유감스럽다. 적절한 선에서 명분을 지키되 실리를 추구하면서 균형 외교와 선린 외교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022년 3월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 있는 고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방문해 조문하고 있다. [중앙포토]   정치는 상대 인정하는 데서 시작  라종일 석좌교수의 선친 백봉(白峰) 라용균(1895~1984)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해방 후엔 제헌국회 의원과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그의 호를 따서 제정한 '백봉 신사상'을 1999년부터 매년 시상한다. 라 석좌교수는 여야 정치권에도 광폭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DJ를 존경한다"는 윤 대통령에게 DJ라면 어떤 정치를 조언할까.  "민심을 잘 살펴 너무 앞서거나 동떨어지지 말고 국민보다 반걸음만 앞서는 정치를 하라고 권할 것 같다. 정치는 상대가 있는 영역이니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야당은 물론이고 좀 더 많은 국민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열린 리더십이 필요하다. DJ라면 외교 무대에서 절제된 표현을 권할 거로 본다."  -윤 대통령이 "힘에 의한 대만해협의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고 발언하자 중국이 강하게 반발했다.    "어떤 경우라도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에 찬성하기는 어렵지만, 한반도에 인접한 강대국에 도전하는 듯한 직설적 발언이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외교 정책은 선택의 여지를 많이 보유하는 것이 기본인데, 선택의 폭이 좁아질수록 그만큼 상황이 나빠진다. 주변 강대국을 상대하는 우리 외교의 원칙은 선린·평화, 그리고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균형 외교여야 한다."      -"DJ 정신이 실종됐다"는 지적을 받는 '이재명의 민주당'에 DJ라면 뭐라고 충고할까.    "DJ라면 여야가 국회 안에서 의회 정치의 기본 정신에 따라 자신과 노선이 다르더라도 협의에 따른 정치를 하도록 충고할 것이다. 자신의 노선이나 입지와 다르다고 국민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 정부를 끌어내리려 하거나 의회 정치의 기본을 소홀히 하고 입법을 일방적으로 강행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지적할 것 같다." 2023년 6월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가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초청한 만찬에 앞서 중국의 입장문을 읽고 있다. 싱 대사는 중국이 미국에 패배할 거라고 베팅하면 후회할 거라는 취지로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다.[중앙포토]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는 큰 실수  -"중국에 셰셰(謝謝·고맙다)만 하면 된다"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발언이 논란인데.  "야당 지도자의 발언이라고 믿기 어렵다. 이웃 국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그저 고맙다고만 하면 된다는 것은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정도다. 정부의 외교 실책을 지적하더라도 외교 문제를 선거 같은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정원 대공수사권의 경찰청 이관을 어떻게 보나.  "대공수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기관은 국정원밖에 없다. 대공수사는 더 절실해졌는데 아무런 준비 없이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없앤 것은 큰 실수다. 대공 수사에 큰 공백이 우려된다. 경찰은 그동안 인력 양성 등 준비가 안 돼 있고 수사 노하우와 자료 처리 능력이 없다. 총선 뒤 22대 국회가 출범하면 최우선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다."   -백봉 선생이라면 요즘 여의도 정치를 어떻게 볼까.  "국회의원은 지방 사업이 아니라 국가의 일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 선친의 지론이었다. 이번 총선 정국에서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말이 나오던데 선친이라면 ‘멋있게 지는 것이 지저분하게 이기는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교수가 2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2024.04.09 00:49

  •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버핏의 오마하 주총처럼 우리 주총도 주주 축제가 돼야

     ━  기업 밸류업 발표 이후 주총 달라졌나   서경호 논설위원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 정기 주주총회는 매년 5월 초 미국 네브래스카주의 소도시 오마하에서 열린다. 올해는 5월 4일인데 주총 전날은 주주들을 위한 쇼핑 데이가, 주총 당일 저녁엔 피크닉이, 주총 다음날은 마라톤(혹은 조깅 내지 걷기) 대회가 이어진다. 쇼핑 데이엔 칵테일을 즐기며 버크셔 해서웨이가 투자한 자회사 제품을 주주 할인가로 살 수 있다. 주총 행사는 이렇게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 3일간 축제처럼 열린다. ‘자본주의의 우드스톡’이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우드스톡’ 오마하 주총   지난해 5월 6일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린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 [AP=연합뉴스] 가장 주목받는 행사는 역시 주총 당일 버핏 등 최고경영진과의 Q&A다. 주주뿐만 아니라 언론도 버핏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인다. 지난해엔 6년째 참석한다는 13세 소녀 데프니의 노숙한(?) 질문이 화제였다. “미국 국가부채가 31조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125%에 달한다. 연방준비제도(Fed)는 인플레이션과 싸운다고 하면서도 몇조 달러를 찍어낸다. (약달러를 예상하고) 중국·사우디아라비아·브라질 등은 달러에서 손을 뗀다. 미래에 달러가 더 이상 기축통화가 아닌 상황을 버크셔 해서웨이는 어떻게 대비하고 있나?”   “저 소녀를 연단에 모셔 답변을 들어야겠는데요”라고 농담한 버핏은 곧 진지해졌다. “다른 어떤 통화도 달러 같은 기축통화가 될 가능성은 없다. 국제무역에서 달러 이외 통화의 결제비율이 높아지고 있지만 달러를 대체하는 수준은 아니다.”     ■  「 버크셔 해서웨이 2박3일 주총…쇼핑, 질의응답, 마라톤 행사 행동주의 펀드 절반의 성공, 사외이사 확보 등 영향력 커져 몰아치기 주총 여전…카카오는 제주도 평일 오전 9시에 열어 」    몰아치기 주총, 소액주주 참석 어려워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AP=연합뉴스] 주주와 경영진과의 격의 없는 소통, 쇼핑에 체육행사까지 어우러진 잔치 같은 주총, 한국 투자자들은 오마하에서 열리는 주총이 부럽다. “우리 기업들도 버크셔 해서웨이와 같은 주주총회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주주들이 대표이사에게 당당히 질문하고, 궁금한 점에 대해 직접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자리를 통해 대표이사가 갖는 경영철학과 관점, 사업의 방향성, 주주를 대하는 태도가 드러나게 된다.”(박영옥·김규식 『주주 권리가 없는 나라』)   한국의 주총은 어떨까. 매년 3월 말에 주총이 몰리는 현상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난달 28일은 ‘슈퍼 주총 데이’였다. 코스피·코스닥 상장사의 3분의 1인 700여 곳이 이날 주총을 했다. 과거에는 소액주주 의결권을 대리하는 시민단체의 참여를 어렵게 하기 위해 같은 날 ‘몰아치기 주총’을 했다지만 요즘엔 주총에서 시민단체를 별로 볼 수 없는데도 기업은 같은 날 주총을 여전히 선호한다. 소액주주의 의결권 행사를 폭넓게 보장하겠다면 이런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신임 대표이사도 불참한 카카오 주총   지난달 20일 경기도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 주총에서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하트하트’가 공연했다. [사진 삼성전자] 지난달 28일은 목요일, 평일이다. ‘28일 오전 9시 제주’에서 열린 주총엔 주주들이 얼마나 참석했을까. 그냥 기업도 아니고 삼성전자 다음으로 많은 185만 명의 주주가 있는 ‘국민주’ 카카오 얘기다. 카카오는 다음커뮤니케이션과 2014년 합병한 뒤 본사 소재지인 제주에서 매년 주총을 열고 있다. 이날 참석한 ‘일반 주주’는 회사 직원과 노조원을 제외하면 10명이 채 안 됐다. 주총에서 새로 선임된 정신아 대표이사도 주총에 참석하지 않았다. 2021년 17만 원대였던 주가가 요즘 5만 원대로 3분의 1토막이 났기에 참석한 주주들이 주가 질문을 던졌지만 이날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홍은택 대표에게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순 없었다. 전자투표 등으로 안건 의결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주총 참석이 어려운 주주들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주총 온라인 중계는 하지 않았다.   올해 코스피 시가총액 상위 50개 기업 중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자동차 등 20개사는 주총을 온라인으로 내보냈다. 삼성전자 등 일부 기업은 대표이사뿐만 아니라 주요 임원진이 총출동해 주주와의 대화에 나섰다. 주총이 단순히 의결 절차를 넘어서 경영진과 소통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올해는 정부가 발표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과 맞물려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환원 요구가 어느 때보다 거셌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을 받은 한국 기업은 2019년 8곳에서 지난해 77곳으로 9.6배 증가했다. 하지만 정작 올해 주총 뚜껑을 열어보니 요구를 관철한 행동주의 펀드는 많지 않았다.   행동주의 펀드, 삼성물산·KT&G에 져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AP=연합뉴스] 삼성물산을 상대로 회사의 현금창출 능력을 웃도는 수준의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를 요구했던 시티오브런던 등 5개 행동주의 펀드는 늑대처럼 떼 지어 공격하는 ‘울프 팩(wolf pack)’ 전략을 썼지만 주총에서 패했다. 행동주의 펀드가 IBK기업은행과 함께 방경만 KT&G 사장 선임에 반대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자신들이 미는 사외이사 한 명을 확보했을 뿐이다. JB금융지주와 태광산업에도 행동주의 펀드가 지지하는 사외이사들이 이사회에 입성했다. 주주제안으로 이사를 선임한 건 국내 금융지주에서 JB금융지주가 처음이다. 태광산업도 2007년 장하성 펀드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주주 제안으로 이사를 선임했다. 주총 전에 기업 스스로 경영진 등 이사 보수의 총액 한도를 줄인 기업도 있었다(삼성전자·SK·LG 등).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로이터=연합뉴스] 한국ESG기준원에 따르면 지난해에도 행동주의 펀드들이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 소각은 관철하지 못했지만, 이사 해임(45.5%)이나 감사·감사위원 선임(31.6%) 등의 주주 제안 가결률은 꽤 높았다. 주주 제안 전 단계인 공개 주주서한 발송도 2020년 4개사에서 2022년 13개사(28건)로 늘었다. 김동양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한 기업이 1년간 9건의 공개서한을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행동주의 펀드가 그래도 ‘절반의 성공’은 거뒀다고 볼 수 있다.   행동주의 펀드의 빛과 그림자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로이터=연합뉴스] 행동주의 펀드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배당과 자사주 소각에 인색했던 한국 기업의 관행에 경종을 울리고, 오너 등 지배주주의 이익만 챙기는 기업의 체질 변화를 이끈 점이 공(功)이라면, 지나친 단기 실적주의로 ‘거위의 배를 가르는’ 주주 환원을 요구하고 자기 이익만 챙기고 ‘먹튀’ 한다는 점은 과(過)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로이터=연합뉴스] 행동주의 펀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날린 이는 미국 저널리스트인 라나 포루하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존재감이 약해진 애플을 보면 그의 지적을 대놓고 반박하기 힘들다. 포루하는 “가장 선망받는 기업인 애플이 전통적인 기업 활동이 아니라 ‘금융 공학’을 통한 돈벌이에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애플의 자사주 매입과 배당은 기업 경영진과 대주주의 배만 불리고, 기업 자체의 중장기적 혁신 역량과 일자리 창출 능력, 경쟁력을 제약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애플을 그 길로 이끈 건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 같은 월가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포루하는 “단기적 성과를 내라는 압박이 가중되다 보면 경제 성장의 핵심인 기업 활동의 동력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며 “오늘날의 기업공개(IPO)는 신생 기업이 훌쩍 커 나갈 새로운 기회의 장이 아니라 성장의 종지부를 찍는 일이 됐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금융과 실물경제, 즉 거저먹는 자(taker)와 만드는 자(maker) 사이의 힘의 차이를 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라나 포루하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   증권가에선 주주 환원을 강화하는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과 행동주의 펀드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이진우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기업 입장에서는 이익 극대화를 통한 주주 환원뿐만 아니라 정부가 주도하는 사회적 기여에도 동참해야 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며 “미국도 1980년부터 퇴직연금 활성화 등의 영향으로 투자 지형이 개인에서 기관투자자로 바뀌었고, 기업 이사회 내 독립 이사진의 비중이 1985년 30%에서 1990년 60%로 급증하며 주주 환원이 개선됐다”고 분석했다.   “한국서 주주권 과잉 걱정은 우스워”   워런 버핏의 소탈한 성품을 느낄 수 있는 2019년 주총 때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최근 기고에서 “과도한 단기주의 등 주주권 과잉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제대로 된 주주 자본주의를 경험해 보지 못한 한국 증시에서 주주권 과잉을 미리부터 걱정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증시의 밸류업을 위해서는 “기업에 대한 직접적 인센티브와 페널티보다 제도 개선을 통해 주주권이 잘 행사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절실하다”고 했다.   소액주주의 합리적인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자. 전자주총이 가능하도록 하는 법무부의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과도한 상속세도 문제지만 우선 상속세를 지금처럼 시가가 아니라 순자산가치로 평가하자. 상속을 앞둔 지배주주가 일부러 주가를 떨어뜨릴 유인이 사라진다. (박영옥·김규식)   올해 주총에서 삼성전자는 자사 스마트공장 지원 사업의 대상인 중소기업 12개사 제품을 전시·판매하는 상생마켓을 열고,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공연도 했다. 모쪼록 주총이 좀 더 즐겁고 유익한 주주들의 잔치가 됐으면 한다.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 주총까지는 아니더라도.     서경호 논설위원

    2024.04.02 01:14

  • 보수정당의 소선거구제 집착, 자승자박 됐다 [김정하 논설위원이 간다]

     ━  총선의 최대 승부처 수도권의 비밀   김정하 논설위원 중국 전국시대 전략가였던 손빈이 제나라 장군 전기의 빈객(賓客)으로 있을 때다. 전기가 제나라 귀족들과 여러 번 마차 경주 내기를 벌였는데 승률이 신통찮았던 모양이다. 경주마도 등급 차이가 있다는 것을 파악한 손빈은 다음과 같은 계책을 전기에게 건넸다.   “상대가 상급마를 내보내면 장군은 하급마로 맞서고, 상대가 중급마를 내보내면 상급마로 맞서고, 상대가 하급마를 내보내면 중급마로 맞서십시오.”   이 계책에 따른 결과 전기는 내기에서 2대1로 승리해 큰돈을 땄고, 손빈이 제 위왕(威王)에게 발탁되는 계기가 됐다는 사기열전의 고사다. 후세에 삼사법(三駟法)으로 불리게 되는 손빈의 필승 아이디어는 현대의 선거전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의 선거구에서 최다 득표자 1명만을 뽑는 소선거구제에선 열세 지역에서 대패하더라도 접전 지역에서 조금씩이라도 대부분 이기면 전체 판세를 승리로 가져올 수 있다. 즉 전체 득표율은 뒤지더라도 총 의석수는 앞서는 게 가능하다. 또는 득표율 격차는 얼마 안 되지만 의석수 차이가 크게 벌어질 수도 있다. 게임의 룰이라고는 하나 득표율과 의석비율의 괴리가 커지면 민주주의의 위기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  「 수도권 동질화 현상 심화하면서 122석이 1개 선거구처럼 움직여   보수, 영남권 ‘싹쓸이’전략 고수 수도권 사표 급증해 오히려 손해   영남권 중심 사고 갇힌 국민의힘 연동형비례·중대선거구 외면 」    득표와 의석수 괴리 커지면 문제   실제로 한국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이런 현상이 점점 심화하고 있다. 특히 최대 승부처인 수도권에서 두드러진다. 먼저 2012년 총선(19대)부터 살펴보자. 당시 새누리당(국민의힘의 전신)은 수도권에서 479만8433표(45.5%)를 얻었고,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은 469만8358표(44.5%)를 얻었다. 그런데 실제 수도권 의석은 새누리당 43석, 민주당 65석으로 오히려 민주당이 22석이나 많았다. 특히 서울에선 새누리당 204만8743표, 민주당 209만6045표로 엇비슷했지만, 의석은 새누리당 16석, 민주당 30석으로 두배 가까운 차이가 났다. 그래도 당시 전국적으론 새누리당 152석(50.7%), 민주당 127석(42.3%)을 차지해 전국 득표율(새누리당 43.3%, 민주당 37.9%)과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이는 새누리당이 영남권을 싹쓸이(총 67석 중 63석)하면서 수도권의 피해를 만회했기 때문이다. 영남권에선 민주당이 소선거구제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이때까지는 권역별로 득표율과 의석비율의 격차가 발생해도 전국적으로는 상쇄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소선거구제의 모순, 즉 득표율과 의석비율의 격차가 두드러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김주원 기자 소선거구제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2016년 총선(20대)부터다. 당시 수도권에서 새누리당은 451만6600표를 얻었고, 더불어민주당은 502만1596표를 얻었다. 득표율은 42.0%(민주당)대 37.8%(새누리당)로 큰 차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수도권 의석수는 민주당 82석 대 새누리당 35석으로 더블 스코어 이상으로 벌어졌다. 민주당이 42.0%의 득표율로 전체 수도권 의석(122석)의 67.2%를 가져간 것이다. 제일 억울한 곳은 국민의당인데 수도권 득표율이 15.4%나 됐는데 의석은 고작 2석에 그쳤다. 득표율 1.7%였던 정의당조차 1석이었는데 말이다. 당시 새누리당은 전국적으로 920만690표를 얻어 민주당 888만1369표보다 많이 득표했지만, 의석은 민주당(123석)이 새누리당(122석)을 제치고 1당을 차지했다.   1987년 개헌 이후 특정 정당이 최대 압승을 거둔 2020년 총선(21대)에서 드디어 소선거구제의 모순이 폭발했다. 당시 121석이 걸린 수도권에서 민주당은 103석(85.1%), 미래통합당은 16석(13.2%)을 차지했다. 민주당이 수도권을 싹쓸이한 것이다. 전체 의석 격차(위성정당 포함 민주당 180석, 통합당 103석)가 77석인데 수도권의 격차만 87석이다. 선거가 수도권에서 결판난 셈이다. 그런데 수도권 득표수를 따져보면 민주당은 771만2531표(53.7%), 통합당은 592만2238표(41.2%)였다. 득표수는 민주당이 통합당보다 1.3배 많은데 의석수는 6.4배나 많은 결과가 나타났다. 1등을 제외한 나머지 표는 모두 사표가 되는 소선거구제의 특성 때문이다. 만약 득표율과 의석비율을 똑같이 연동하는 완전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더라면, 민주당은 전국 49.9%의 득표율로 150석, 통합당은 41.5%의 득표율로 125석을 얻었을 것이다. 소선거구제였기 때문에 25석의 격차가 77석으로 확 벌어졌다.   수도권 득표율 54대41→의석 103대16   아이러니한 것은 21대 총선을 앞두고 진보 진영이 먼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 44조3항엔 “국회의 의석은 투표자의 의사에 비례하여 배분해야 한다”는 문구가 추가됐다. 당시 조국 민정수석은 “현재의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방식은 과다한 사표를 발생시키고 정당득표와 의석비율의 불일치로 유권자의 표심을 왜곡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미래통합당의 강한 반대와 민주당 호남권 의원들의 소극적 자세 때문에 연동형 제도의 효과가 많이 감소한 애매한 형태(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현행 선거 제도가 도입됐다.   김주원 기자 보수 정당의 전통적 총선 전략은 소선거구제에서 ‘영남권 싹쓸이’를 바탕으로 수도권에서 적당히 선방하면 1당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 전략은 2012년까진 통했다. 하지만 2016년 총선부터 수도권에서 심상찮은 징조가 나타났음에도 통합당은 새 전략을 짜지 못하고 관성적인 판단만 하다 2020년 총선에서 대실패를 맛봤다.   총선에서 수도권의 비중이 절대적인 이유는 의석 규모가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도권 동질화’ 현상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는 게 더욱 중요한 측면이다. 만약 수도권의 선거구마다 개별 특성과 이슈가 고유하다면 특정 정당이 싹쓸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금 수도권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상징되는 주거 환경의 규격화가 고도로 진행됐고, 교통·교육·취업·여가 등 라이프 패턴도 지역마다 엇비슷해지고 있다. 이런 여건에선 122석(22대 총선)의 수도권 표심이 마치 하나의 선거구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수도권 선거는 호각의 결과보단 21대 총선처럼 한쪽으로 확 쏠리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훨씬 크다.   민주당 지도부는 대부분 수도권   지금 22대 총선을 앞두고 쏟아지는 각종 여론조사가 더불어민주당의 대승을 예상하는 이유도 수도권에서 민주당의 초강세 때문이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은 “원래 수도권은 호남 출신 유권자가 많고, 진보 성향인 30~40대 샐러리맨의 비중이 높아 보수 진영에 불리한 공간이었다”고 지적했다. 배 소장은 “윤석열 정부의 명운이 수도권 총선 결과에 달렸다는 점을 생각했다면 국민의힘은 진작부터 수도권 민심에 어필할 수 있는 인사를 당 간판으로 내세워야 했는데, 오히려 당 대표·원내대표를 죄다 영남 인사로 앉히면서 거꾸로 갔다”고 말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도 “국민의힘 지도부가 영남권 시각에 갇혀 선거 전략을 짜다 보니 전국적 관점에서 총선을 준비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의 인구 변동 추이로 보면 수도권의 비중은 앞으로 계속 커진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가 대부분 수도권 출신이다. 당의 체질과 전력이 수도권에 최적화됐다는 의미다. 2016년 총선 때 민주당이 호남에서 국민의당에 대패를 당했지만, 1당을 차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반면 국민의힘의 주류인 친윤계에서 수도권 출신은 가물에 콩 나듯 이다. 그러니 국민의힘에서 영남 기득권을 일부 포기하고, 수도권에서 그 이상의 과실을 챙기자는 발상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선거제 개편 논의가 제기됐을 때 국민의힘 지도부는 줄곧 소선거구제 유지를 외쳤을 뿐, 중·대선거구제나 완전연동형 비례대표제 등은 진지하게 검토를 하지 않았다. 영남권 중심의 사고가 자승자박이 된 형국이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외과 교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나 중·대선거구제가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된다”면서도 “투표를 통해 누구를 심판하려는 국민정서에는 소선거구제가 맞기 때문에 다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김정하 논설위원

    2024.03.28 00:34

  • "트럼프 잡기 위해 장녀, 사위, 장남에 모두 손편지 보냈다" [김현기 논설위원이 간다]

    김현기 논설위원 2017년 1월 23일 미국 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취임 사흘 만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철수하는 행정명령에 사인했다. 건강보험개혁법(오바마케어)도 무력화했다. 송유관 건설사업 재추진도 선언했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쌓고, 반이민 행정명령도 냈다. 취임 100일 동안 낸 행정명령만 무려 30개.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착수, 주한미군 철수 검토 등 쇼킹한 일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금 미국은 트럼프에 다시 환호한다. 왜 그럴까.      전문가 분석을 종합하면 그 저변에는 ▶고물가(바이든 정부 출범 후 20% 상승) ▶우크라이나에 미 국민 세금 과다 지원 ▶이민자 급증(트럼프 1기 대비 3배)에 대한 3가지 불만이 깔려있다. 이를 트럼프는 교묘히 '분노'로 전환시킨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현재 걸려있는 4개 재판에서 모두 유죄가 될 경우 최대 717년 형량을 받고 선거 전에도 감옥에 갈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미 헌법에는 범법자의 대통령 취임을 금지하는 규정이 없다. 교도소에서 취임식을 하거나 트럼프가 자신을 '셀프 사면'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우리는 트럼프에 대해 "입만 열면 뻥"이라 희화화하곤 하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트럼프만큼 자신이 뱉은 말을 잘 실행한 대통령도 드물다. 그래서 더 무섭다. 이런 트럼프를 당시 워싱턴 일선에서 생생하게 마주했던 안호영 주미대사(현 경남대 석좌교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작 안 전 대사는 '트럼프 2기'의 가능성에 신중했다. "1992년 미 대선 당시 주미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있을 때 아버지 부시가 된다고 누구나 생각했는데 빌 클린턴이 됐고, 2016년 주미대사로 있을 때 누구나 힐러리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트럼프가 돼 두 번이나 예측이 틀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트럼프 1기 안호영 전 주미대사의 조언 「 첫 한미정상회담 모두발언 때 트럼프 돌연 "FTA 재협상 중" 시작도 안 한 재협상을 하고 있다고...예측 불가능의 지도자 트럼프-푸틴 만나도 기록 안 남겨...미-러 관계 심히 우려돼 뚜껑 열릴 때까진 눈에 띄지 않게 트럼프 주변다지기 나서야 」   ━  내가 겪은 트럼프   트럼프 1기 정부 출범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뭐였나. 선거 기간 중 트럼프의 발언 등으로 미뤄 한미FTA에 손을 대려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트럼프 취임 후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따로 만나 충분히 그 부당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고 한 달반 만에 워싱턴을 찾았을 때였다. 2017년 6월 30일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첫 한미정상회담을 시작하기 전 기자들이 들어온 가운데 양국 정상이 한마디씩 모두발언을 하는데 갑자기 트럼프가 '한국과 미국 정부가 한·미 FTA 개정 협상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서프라이즈 중의 서프라이즈였다. 아니 시작도 안 한 협상을 하고 있다고 하다니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전날 만찬에서도 트럼프는 문 대통령을 앞에 두고 계속 윌버 로스 상무부 장관에게 철강·자동차 등 한국과의 통상 사안을 문제 삼고 이에 로스 장관이 거들었다. 하여간 예측이 어려운 대통령이었다.     2017년 6월30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한미정상회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이미 시작했다고 발언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트럼프 당선 전, 그리고 당선 후 어떻게 정권 핵심들에 접근했나.  대선 1년 전부터 고민이었다. 공화당의 기존 정치인과 전직 관료에 더해 밑져야 본전이라고 트럼프의 장녀 이방카뿐 아니라 사위 쿠슈너, 장남 트럼프 주니어에게도 손편지를 써  보냈다. 본전 이상은 건진 게 모두 내게 답장을 보내왔다. 적어도 입력은 됐다는 이야기였다. 실제 쿠슈너는 취임 전 내게 초대 국가안보보좌관이 된 마이클 플린까지 소개해줬다. 뉴욕 트럼프타워에서 플린을 만난 장면이 CNN 등 미 언론에 생방송으로 나가면서 워싱턴의 다른 주미대사들로부터 '어떻게 플린을 만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물론 영업비밀이니 자세한 이야기는 해 줄 수 없었지만. (웃음)     2016년 첫 당선 때는 우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왜 또 미국인은 트럼프에 환호하나.  2011년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을 기억하나. 1% 금융자본에 맞선 99%의 싸움이라며 경제 불평등 해소를 주장한 사회운동이었다. 그때 유력 언론들은 '조만간 이게 정치운동이 되면 그 파장은 엄청날 것'이라 했다. 그게 트럼프로 현실화된 것이다. 기존 정치인들은 불평등의 원인과 해법을 어렵게 이야기하나 트럼프는 콕 집어서 '중국이 저렇게 싸구려 물건을 자꾸 보내니 그런 거야. 그러니 화끈하게 관세를 때려야 해'라며 머리에 쏙 들어오게 외쳤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  트럼프 2기의 한반도     트럼프 2기의 정부정책 과제를 집대성한 '프로젝트 2025' 보고서의 국방 분야 집필자 크리스토퍼 밀러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여전히 2만8500명의 주한미군을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변화가 필요한지 솔직하게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했다. 만약 트럼프 2기 정부가 출범한다면 주한미군 철수가 현실화되는 것 아닌가. 보고서에는 (인터뷰 발언과는) 다른 긍정적 측면도 많다. 가령 가장 앞에는 이렇게 썼다. '미국 안보에 가장 위협은 중국이다. 그런데 안보상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국가가 한국과 일본이다'.  보고서는 또 '미국 군함이 너무 부족하다. 최소 355척은 건조를 해야 한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 이제 동맹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돼 있다. 조선하면 한국 아닌가. 인터뷰에서도 밀러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통해 미 방위산업에 문제가 많다는 게 드러났다. 이를 재건해야 한다. 재건 과정에서 미국이 꼭 협력해야 할 대상은 한국'이라고 못박았다.   안호영 전 주미대사가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하지만 밀러는 인터뷰에서 "북·미 군축협상론에 대해서도 나는 왜 안되느냐(Why not?)이란 의견에 찬성하는 편" "이제 기대가 아니라 현실에 기반을 두고 협상해야 한다”고 했다. 이건 근본적으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자는 것 아니냐. 밀러가 트럼프 1기 후반에 국방부 장관 대리를 하긴 했지만, 북핵 문제를 깊이 고민하지 않았구나,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트럼프 2기 핵심 각료로 거론되는 오브라이언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최근 발언이 떠올랐다. 오브라이언은 분명하게 '북한의 행동을 보면 한국이 왜 핵무장을 하려 하는지 이해는 된다. 하지만 그건 옵션이 아니다. 역시 미국의 확장억제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국가안보를 총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따라서 특정 인사의 발언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트럼프 2기의 미·러, 미·중 관계 전망은. 중국에 대한 강경 자세는 공화당, 민주당이 따로 없다. 걱정되는 건 미·러 관계다. 트럼프 1기 때 내가 가장 우려했던 건 트럼프와 푸틴이 만나는 데 기록을 안 남긴다는 것이다. 진짜 섬찟한 이야기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고 한다. 핵무기를 몇천개씩 지닌 미국과 러시아의 대통령이 만나 이야기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기록이 없다는 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지 6개월 뒤인 2017년 7월 트럼프 대통령(오른쪽)과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이야기는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는 모든 수입품에 10% 보편적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한다. 한국 같은 FTA 체결 국가에도 이를 적용할 것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새로운 관세를 부과하는 것 자체가 한미FTA 위반이다.   트럼프가 언제 그런 상식적 판단을 하던가. 지금 얘기하기는 좀 이르다.      ━  한국의 트럼프 대응방안은   바이든이 다른 인물로 교체될 가능성은. 미 역사상 재선에 출마한 현직 대통령이 후보에서 이탈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트럼프와 바이든의 맞대결이 될 것이다.   트럼프 2기에 대비해 어떤 조언을 하겠나. 뚜껑을 열 때까지 모른다. 너무 나가면 곤란하다. 지난 8일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는 미국을 가 바이든을 안 만나고 트럼프만 만났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해선 안 된다. 눈에 띄게 하지 말고 물밑에서 준비하다가 필요할 때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왼쪽 둘째)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 셋째)가 2016년 11월 17일 뉴욕 트럼프타워 자택에서 만났다. 맨 오른쪽은 장녀 이방카, 맨 왼쪽은 국가안보보좌관에 내정된 마이클 플린.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 당선 직후 트럼프타워를 방문했던 일본 아베 총리처럼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건가. 물론 만나서 관계가 나빠지는 경우보다 좋아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하지만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아베가 트럼프타워를 가는 걸 보면서 난 좀 일본이 이악스럽게 일을 하는구나. 국가 이미지에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워싱턴에서 '트럼프 대응'을 위해 필요한 점은. 일단 탁월한 현지 사령관(주미대사)을 믿어야 한다. 국내에선 '일본은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는 데 우린 뭐하냐'고 지적하는데, 우리도 1기 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물밑에서 뛰고 있다고 믿는다. 주미 일본대사관이 미 로비회사 25곳을 쓰는데 우리는 5곳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안 되겠다 싶으면 조현동 대사 스스로 건의할 것이다. 일단은 믿고 성원해야 한다. 김현기 논설위원

    2024.03.26 00:40

  • 단열에 태양광 발전까지…에너지 생산하는 건물 온다 [최현철 논설위원이 간다]

     ━  성큼 다가온 제로에너지 건축물 시대   최현철 논설위원 자동차를 바꿀 때 전기차를 살지 한 번쯤 고민하게 된다. 정부는 석탄 발전소를 태양광이나 풍력으로 대체할지 검토한다. 기업들은 신재생에너지를 쓰지 않으면 수출할 때 관세를 물게 될까 걱정이다. 어느새 탄소 줄이기는 일상의 고민이 됐다.   이런 변화가 건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건축은 발전과 산업, 수송에 이어 탄소배출량이 4번째로 많은 분야다. 2018년 5210만 t을 2030년까지 3500만 t으로 32.8%나 줄이겠다는 감축 목표치가 나와 있다. 이미 그런 목표를 실현해나가는 건물이 하나둘 늘고 있다. 제로에너지 건축물이다.     ■  「 노원 이지하우스, 패시브 건축 기술로 에너지 자립률 126% 제로에너지 건축물 인증제 도입, 지금까지 1057곳 본인증 공공임대도 인증 의무화…공사비 급증에 민간 확대 주춤 서울시 용적률 인센티브 검토…2030년 100조원 대 예상 」    패시브 건축의 이정표   서울 노원구 하계동에 위치한 노원 이지하우스 전경. 아파트 3개 동을 포함, 단독주택과 연립주택 등으로 구성된 이 단지에는 121세대가 실제 거주하고 있다. 2017년 준공된 이지하우스는 국내 제로에너지 건축 분야에서 이정표 역할을 했다. 제로에너지 건축물은 자체 생산하는 에너지로 사용할 에너지를 다 충당할 수 있는 건물이라는 의미다. 지난 12일 둘러본 서울 노원구 하계동 ‘노원 이지하우스’는 이 분야에서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한 건축물이다. 이름도 에너지 제로(Energy Zero)의 영문 첫 글자를 따 지었다. 노원구 중계동 학원가에서 하계역으로 이어지는 한글비석로에 위치한 이지하우스는 무심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모르고 지나칠 만큼 평범한 아파트 단지다. 아파트 3개 동, 빌라 1개 동과 복층형 단독주택 3채로 구성된 주택단지로 121세대의 주민이 실제 거주한다.   이 곳은 2013년 정부가 발주한 제로에너지 공동주택 실증단지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으로 출발했다. 이 과제를 이명주 명지대 교수팀과 서울시, 노원구, KCC 컨소시엄이 따냈다. 독일 유학 후 2003년 명지대에 부임한 이 교수는 건물 에너지 분야 전문가다. 독일은 이미 1990년대부터 단열, 고성능 창호, 공기 밀폐, 열전달 차단 등을 통해 에너지 소요량을 줄이는 패시브 설계가 도입됐다.   이 교수는 실증단지에 일종의 실험 주택부터 만들었다. 이곳에서 패시브 기술에 필요한 온갖 자재의 성능을 실험하고, 지어진 뒤 주택의 상황을 재연해가며 설계와 시공을 수정해갔다. 이 교수는 “당시에 처음 도입하는 방식이어서 대부분의 부품과 자재를 주문생산하고 일부는 수입해 썼다”며 “개별 부품과 장비는 설계대로 효율을 내는데, 전체 시스템으로는 조화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생겨 고생했다”고 설명했다. 이때 축적한 노하우가 국내 패시브 건축 시장 확대에 초석이 됐다.   패시브 설계의 기본은 단열. 일반 건축물은 벽 안쪽에 단열재를 넣고 내부 마감을 한다. 외부로 노출된 콘크리트 벽은 여름엔 구들장이 되고, 겨울엔 안쪽 열을 밖으로 내뿜는 에어컨 실외기가 된다. 이를 막기 위해 이지하우스는 벽 바깥에 단열재를 붙이는 외단열을 채택했다. 블라인드를 창 안쪽이 아닌 바깥에 붙인 것도 같은 이유다. 삼중 유리 창문을 달고, 단열 부위에 열이 세는 것을 막는 테이핑을 했다. 단열재가 보강된 현관문은 냉장고 문 만큼 두껍다. 외부로 돌출된 발코니와 본체 벽 연결 부위에서 단열이 끊기고 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위해 스테인리스 스틸을 용접한 철근이 들어간 차단재를 썼다. 그야말로 ‘열 셀 틈 없는’ 시공만으로 전체 에너지 소비량이 74%가량 감소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향동지구에 위치한 에너지엑스 DY 빌딩 전경. 상업용 건물로는 처음으로 제로에너지 건축물 1등급을 받은 건물로, 에너지 자립률이 121%에 이른다. 여기에 에너지를 자체 생산하는 액티브 기술을 더했다. 건물 옥상과 벽에 1274개의 태양광 패널을 달아 전기를 생산한다. 지하에 160m 깊이로 48개의 구멍을 뚫고 파이프를 박아 물을 주입하면 사시사철 15℃를 유지하게 된다. 이 물을 히트 펌프로 데우거나 식혀 냉난방과 급탕용으로 쓴다. 물론 히트 펌프도 태양광 발전에서 얻은 전기로 돌린다. 이 교수는 “비용이 더 들지만 조금 신경 써 지으면 생각만큼 크게 늘지 않는다”며 “결국 발상과 관심의 차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팀은 완공 이후에도 7년 동안 현장에 상주하며 건물 유지와 데이터 수집·분석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상주하고 있는 이응신 교수는 “아무리 세심하게 설계를 했어도 실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문제가 생기는데 이를 방치하면 애써 만든 실증단지가 순식간에 일반 주택으로 전락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축적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제 설계 효율을 달성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결과를 건축 전문잡지를 통해 발표했다. 2020년 분석치에 따르면 2017년 12월부터 28개월간 총 태양광 발전량은 97만㎾h, 히트 펌프와 일반 전력 사용량은 77만㎾h로 에너지 효율은 126%를 달성했다. 제로 에너지를 넘어 플러스 에너지 건물인 셈이다.   민간에도 확대되는 제로에너지 건축   노원 이지하우스가 한창 지어지고 있는 동안 국내 주택 분야 탄소절감 로드맵이 나왔다. 준공 무렵엔 제로에너지 건축물 인증제가 도입됐다. 에너지 자립률(사용량 대비 자체 생산량 비율)이 20% 이상이고 건물 에너지관리 시스템(BEMS)을 갖춰야 인증을 신청할 수 있다. 자립률 20~40%면 5등급, 100% 이상은 1등급을 받는 식이다. 2020년 1000㎡ 이상 공공 건축물부터 인증이 의무화됐다. 인증 없이는 인허가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지난해에는 500㎡ 이상 공공건물과 30세대 이상 공공 아파트도 대상에 포함됐다. 이제 신축 공공임대 아파트는 최소 20% 이상 자체 생산 에너지를 써야 한다. 올해부터는 30세대 이상 민간 아파트로 확대될 예정이었는데 당분간 연기됐다. 2030년부터는 공공, 민간부문 모두 연면적 500㎡ 이상 건축물 신축 시 제로에너지 건축물 인증을 받게 한다는 게 정부 로드맵이다.   현재까지 5241개 건물이 예비인증을 통과했고, 이 중 1057곳이 준공 후 실사를 거쳐 본 인증을 받았다. 자립률 20%만 넘기면 인증이 나오지만 100%를 달성한 1등급 건물도 66곳이나 된다. 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로드맵이 제대로 이행될 경우 제로에너지 건축물 시장 규모는 2030년 93조~107조원, 2050년에는 180조4000억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상한다.   최초의 상업용 플러스에너지 빌딩   아직 인증 의무 대상이 아닌 민간에서도 시장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삼성물산이 부산 에코델타시티에 지은 스마트 빌리지, SK의 과천 게스트하우스, LG전자의 판교 씽크홈 등 대기업들이 시험 제작에 뛰어들었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향동지구에 세워진 에너지엑스 DY 빌딩은 상업용 빌딩으로는 유일하게 인증을 받은 건물이다. 지하 2층 지상 5층에 연면적 3000㎡가 넘는 규모인데 1등급을 받았다.   에너지엑스는 정보기술(IT) 건축 플랫폼을 지향하는 스타트업이다. 건축주와 건축사·건설사(시공사)·관리회사를 연결해주는 플랫폼을 구축하고, 에너지엑스는 그 안에서 설계나 컨설팅을 했는데 점차 제로 에너지 건축 쪽으로 초점을 맞추게 됐다. 그동안 축적한 기술을 선보이고 새 기술을 실증·분석하는 테스트 베드로 쓰기 위해 직접 향동지구에 새 사옥을 지었다. 지난 14일 이 빌딩에서 만난 홍두화 공동대표는 “일종의 모델하우스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좀 들더라도 현재 구현 가능한 최고의 기술을 적용해 지은 건물”이라고 소개했다.   노원 이지하우스가 패시브 기술에 심혈을 기울였다면 이 건물은 액티브 쪽에 강조점을 뒀다. 우선 건물 외벽에 태양광 패널을 붙인 것이 아니고 외벽 자체를 태양광 패널로 마무리한 일체형 방식(BIPV)을 도입했다. 창에도 전기를 만드는 반투명 패널을 달았다. 물론 패시브 기술은 기본. 홍 대표는 “지열 시스템은 없지만 태양광 만으로도 건물에서 쓰는 에너지의 121%를 생산한다”고 말했다.   이 건물 5층엔 대형 모니터를 모아놓은 관제센터가 있다. 층별 에너지 사용량과 발전량 등을 표시하는 건물 에너지 관리 시스템(BEMS)이다. 에너지엑스는 이 시스템에 인공지능을 입혀 원격 제어하는 서비스 제공을 장기 목표로 삼고 있다.   건축비 부담에 속도 조절   그간 빠르게 확대되던 제로에너지 건물 인증 의무화는 올해 제동이 걸렸다. 건축비 상승 여파다. 제로에너지를 구현하려면 일반 건물보다 비용이 더 들 수밖에 없다. 건설산업연구원은 제로에너지 5등급을 달성하려면 비주거 건축물은 30~40%, 공동주택은 표준건축비보다 4~8% 비용이 늘어난다고 분석했다. 인허가를 다 받은 재건축 단지도 건축비 부담을 이기지 못해 무산되는 마당에 이런 추가부담을 안으라는 요구가 무리라는 판단이다. 그래서 올해 도입하려던 30세대 이상 민간 공동주택의 인증 의무화는 일단 연기됐다.   그렇다고 한정 없이 밀릴 것 같지는 않다. 국제사회에 매년 탄소 감축량을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빠듯하게 짜인 계획인데, 한 분야를 봐주면 다른 분야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인센티브를 늘리는 방안이 고려되고 있다. 서울시는 재건축 때 제로에너지인증을 받으면 용적률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용적률 300%로 30층 높이를 계획 중인 단지가 인증을 받게 되면 34층까지 지을 수 있게 된다. 최현철 논설위원

    2024.03.19 00:40

  • [주정완의 논설위원이 간다] ‘벚꽃 엔딩’ 농담 아니었다…1년에 한 곳씩 지방대 폐교

     ━  2000년 이후 21번째 폐교-태백 강원관광대   주정완 논설위원 또 한 곳의 대학이 문을 닫았다. 이번엔 강원도 태백의 강원관광대(옛 태성전문대)다. 1995년 개교한 사립 전문대인 이 학교는 지난달 말로 29년 역사의 마침표를 찍었다. 2000년 이후 대학 폐교는 전국에서 21번째, 강원도에선 동해시 한중대에 이어 두 번째다.   남은 학생의 대부분은 태백에서 자동차로 2시간가량 떨어진 충북 음성의 사립 전문대인 강동대로 편입했다. 태백 지역 사회에선 ‘먹튀’라는 말까지 꺼내며 강하게 반발하는 분위기다. 일부 시민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폐교 인가 취소 소송 등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  「 YS 정부 때 개교한 사립 전문대 한때 학생 2500명 넘기며 활기   재단 비리, 교직원 파업에 휘청 마지막 남았던 간호학과도 폐지   “땅도 기부하고 장학금도 줬는데” 비대위 출범 등 지역 반발 커져 」    학생 사라지자 주변 상권도 썰렁   지난달 27일 강원도 태백의 강원관광대 교문 앞에서 바라본 풍경. 주정완 기자 지난달 27일 오후 태백 황지동의 강원관광대 캠퍼스를 찾아갔다. 교문 앞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텅 빈 운동장에는 눈만 쌓여 있었다. 다른 학교 같으면 봄학기 개강을 앞둔 시점이지만 모든 학생이 떠나간 캠퍼스는 썰렁하기만 했다. 빨갛게 녹슬어 가는 교내 안내판은 폐교의 차가운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골프산업과와 실용음악과 등이 있던 산학관 입구는 단단한 쇠사슬로 묶여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카지노과·호텔관광과 등 특성화 학과가 있던 관광관 건물도 굳게 잠겨 있었다. 한때 신입생 입학 원서를 받던 웅비관 건물로 발길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졸업 가운과 학사모가 놓인 탁자가 눈에 띄었다. 그 옆에는 ‘2024년 학위수여식 포토존 운영 안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졸업생들이 각자 알아서 기념사진을 찍고 가라며 임시로 설치한 사진 촬영 구역이었다.   학생이 사라진 대학 주변 상권은 활기를 잃었다. 대학길로 불리는 교문 앞 거리엔 문을 닫은 식당과 카페 등이 수두룩했다. 어쩌다 영업하는 곳이 있어도 손님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한중대 캠퍼스 ‘공포 체험장’ 전락   폐교한 강원관광대 운동장과 지성관(본관) 건물 모습. 주정완 기자 같은 날 오후 동해시 지흥동의 한중대 캠퍼스도 둘러봤다. 6년 전 강원도 폐교 1호였던 대학이다. 여러 차례 매각을 추진했지만 번번이 무산되고 아직도 새 주인을 찾지 못했다. 그사이 대부분 시설은 폐허로 방치됐다. 일부 개인 유튜버들은 흉물이 된 건물 안을 돌아다니며 공포 체험 영상을 찍기도 했다. 폐교 이후 활용 방안을 찾지 못한 대학 캠퍼스가 어떤 모습으로 전락하는지 보여줬다.   졸업생 기념사진을 위한 포토존. 주정완 기자 현재 본관 건물 입구는 두꺼운 합판을 여러 장 덮어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 앞에는 고장 난 트럭 한 대가 욕설이 적힌 낙서와 함께 버려져 있었다. 문이 열린 작은 건물을 들여다봤더니 안쪽 벽에는 곰팡이가 가득 피어 있었다. 캠퍼스 안에서 온전한 곳은 동해시 창업보육센터로 쓰는 건물뿐이었다. 원래 대학 시설이었지만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운영하는 시설로 바꾼 덕분에 살아남았다.   “학생도, 학부모도 싫다고 한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망한다는 ‘벚꽃 엔딩’의 속설은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 서울에서 거리가 먼 순서대로 신입생 모집이 어려워져 폐교 위기에 놓인다는 얘기다. 최근에는 한 해에 한 곳꼴로 문을 닫는 추세다. 2020년 부산 해운대구의 동부산대, 2021년 전북 군산의 서해대, 2022년 전남 광양의 한려대에 이어 지난해엔 경남 진주의 한국국제대가 폐교했다.   강원관광대도 처음부터 부실 대학이었던 건 아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개교하고 2년 뒤 입학 정원이 1280명까지 늘었다. 한때 재학생 2500여 명으로 태백 지역 인구 유지와 경제 살리기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교비 횡령이란 학교법인(분진학원) 비리가 발목을 잡았다. 2002년부터 8년간 교육부가 파견한 임시이사(관선이사)가 학교를 맡았다. 2010년에는 기존 법인 임원이 복귀하고 이사장 부인인 원재희 총장이 취임했다. 당시 원 총장은 태백시민 토론회에서 “법원 판결에서 ‘교비를 법인비로 전환한 것이 횡령’이라고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단 한 푼도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2019년에는 교직원 노동조합의 장기 파업 등으로 극심한 학내 갈등을 겪었다. 당시 노조는 ▶‘유령 학생’ 등 재학생 충원율 조작 ▶보복성 인사 조처 등으로 학교 운영이 위기를 맞았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재학생 충원율을 조작해 정부 지원금을 받은 혐의로 원 총장을 기소했다. 이후 법원은 “피고인이 구체적 지시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는 사이 신입생 모집에 어려움은 커졌다. 2020년에는 간호학과만 남기고 호텔관광과 등 여섯 개 학과를 모두 없애기로 결정했다. 2022년에는 정부의 재정지원 제한 대학으로 꼽히면서 학생들에 대한 국가장학금 지원과 학자금 대출이 끊겼다. 지난해 9월에는 올해 신입생 모집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지난 1월 16일 강원관광대 폐교에 대한 공청회에서 원 총장은 “학생도, 학부모도 싫다고 한다. 지역 여건이 나빠서, 태백이라는 게 싫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교육부는 지난달 6일 이 학교의 자진 폐교를 인가했다.   “공청회는 요식행위, 시민 염원 배신”   학교 근처에서 송대섭 강원관광대 살리기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났다. 송 위원장은 태백에서 30년가량 시민단체 활동을 하며 강원관광대의 개교에서 폐교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과거 강원관광대 창업보육센터에서 특허 출원 지원 등 창업 컨설턴트로 활동한 적도 있다. 만학도로서 이 학교 골프산업과를 다니기도 했다. 다음은 송 위원장과의 일문일답.   비대위가 ‘먹튀’라고 주장한 근거는 뭔가. “1994년 대학 설립 인가를 받을 때부터 태백 시민들은 한마음으로 학교가 잘되기를 응원했는데 배신 당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지역 유지는 당시 16만5290㎡(약 5만 평)의 땅을 기부하며 학교 설립을 도왔다. 태백시와 강원도가 학생 장학금 등으로 지원한 금액도 88억원이 넘는다. 학교가 살아야 지역이 산다는 애향심에서 만학도로 학교에 등록했던 시민들도 적지 않다. 학생 충원율 지표를 맞추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시민들에게 최소한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폐교를 결정했다.”   폐교에 앞서 공청회를 열지 않았나. “지난 1월 12일 금요일 학교 측이 공문을 돌리고 나흘 뒤 화요일(지난 1월 16일) 오전에 공청회를 열었다. 생업이 있는 시민 대부분은 평일 오전에 참석이 어렵다. 현장에 가보니 학교 관계자와 취재진을 제외한 일반 시민은 거의 없었다. 나중에 교육부 보도자료를 보니 학교 측은 공청회 나흘 전에 이미 교육부에 폐교 인가를 신청했다. 공청회는 요식행위였을 뿐이다.”   폐교 말고 학교를 살리는 대안이 있었을까. “학교를 매각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강릉영동대는 조건이 맞으면 학교를 인수하려고 했는데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과거 강원랜드가 학교 인수를 추진한 적도 있다. 2003년 태백지역 현안대책위원회와 강원랜드의 합의사항 중 여섯째 항목이 강원관광대 인수였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 매각 가격을 높게 부르는 바람에 무산된 것으로 안다. 이제는 지역 사회가 학교 공간을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강원랜드의 지원을 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본다.”     ■ “문 닫아야 할 대학 절반도 안 닫았다” 「 양정호 벚꽃 피는 순서와 대학 폐교 위기의 상관 관계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연구도 있다. 양정호(사진)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가 지난해 9월 발표한 보고서(‘지역 인재육성과 경제활성화를 위한 지방대학 발전방안’)다. 양 교수는 “2040년에는 지방대 절반 이상이 사라질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양 교수와의 일문일답.   지금까지 21개 대학이 폐교했다. “21개가 많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여태까지 문 닫은 대학이 왜 21개밖에 안 되나, 그걸 고민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벌써 50개 정도는 문을 닫았어야 한다. 다른 50개 대학도 간당간당하다. 현재 정원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신입생을 채운다는 건 불가능하다. 출생아 수 통계만 봐도 간단하게 알 수 있다. 학생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나.”   대학의 ‘벚꽃 엔딩’은 어떻게 분석했나. “서울 광화문을 기점으로 각 대학까지 거리를 일일이 계산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입시 경쟁률이나 신입생 충원율, 졸업생 취업률 등이 떨어지는 상관 관계가 분명히 나타났다. 그동안 말은 많았지만 이런 식으로 검증한 건 처음일 것이다. 다만 예외도 있었다. 부산의 한국해양대와 전남의 목포해양대가 대표적이다. 대학 특성화의 좋은 사례다.”   지방대학을 살릴 방법은 없을까. “한계대학은 빨리 문을 닫게 해야 한다. 늦으면 늦을수록 사회적 비용이 더 커진다. 정부가 학교에 직접 돈을 주지 않아도 학생에 대한 국가장학금 등으로 돈이 들어간다. 이런 학교가 끝까지 버티지 않도록 출구를 열어줘야 한다. 살아남고 싶은 대학은 특성화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지방 학교끼리 뭉치는 건 잘못하면 같이 망하는 길일 수도 있다. 학생들이 원하는 게 뭔지 제대로 파악하고, 필요하면 서울의 대학과 연계해야 한다.” 」 주정완 논설위원

    2024.03.15 00:32

  • [세컷칼럼] 기껏 아파트 잘랐는데…공항 옆 고도 초과 장애물 3647곳

      관련기사 기껏 아파트 잘랐는데…공항 옆 고도 초과 장애물 3647곳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글=강주안 논설위원 그림=심혜주 인턴기자 

    2024.03.14 23:00

  • 기껏 아파트 잘랐는데…공항 옆 고도 초과 장애물 3647곳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  〈입주 시작하는 '고도 위반' 김포 고촌 아파트〉     강주안 논설위원  ‘3월 12일부터 입주 시작.’ 지난달 29일 카카오톡으로 한 통의 문자가 날아왔다.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에 있는 신축 양우내안애 아파트 관계자의 연락이다. 8개 동 399가구의 이 아파트는 두 달 전에 입주가 이뤄졌어야 했다. 그런데 아파트가 너무 높게 건설됐다는 이유로 주민들은 이사 직전 “입주 불가” 통보를 받았다. 공항 인근에 적용되는 고도 제한 높이(57.86m)보다 63~69㎝ 초과했다는 이 유다. 살던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하려던 주민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지난해 12월 22일 한국공항공사가 ‘해당 건축물이 장애물 제한표면을 침투했다’고 통보한 이후 해결 방안을 도출하지 못하면서 결국 멀쩡한 아파트 윗부분 69㎝ 이상을 잘라내는, 사상 초유의 공사가 시작됐다. 당시 “공사를 마친 아파트의 윗부분을 제거하는 게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전문가 경고가 나왔지만, 허가 당국의 입장은 완강했다. 지난달 시작한 공사가 최근 마무리됐다. 15층 아파트의 옥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난 8일 오후 3시쯤 해당 아파트를 찾아가 봤다.   제한 고도를 초과한 경기도 김포시 고촌 양우내안애 아파트 옥상의 지난 1월 모습(왼쪽)과 건물 일부를 잘라낸 이후인 지난 8일 모습. 사진 속 인물은 곽종근 지역주택조합장이다. 강주안 기자  ━  전쟁터 방불케 한 ‘아파트 자르기’   지난 1월 26일 현장 취재한 옥상은 여느 아파트와 비슷했다. 엘리베이터 관련 설비가 설치된 옥탑 시설에 옥상 출입문이 있고 난간이 웅장하게 옥상을 감싸고 있었다. 시공사인 양우건설이 한 달여 동안 공사를 진행한 결과 옥탑 건축물이 63㎝ 이상 잘리면서 천장이 확 낮아졌다. 옥상으로 향하는 복도는 보통 키(1m 74㎝)인 기자의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옥상 출입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공사를 마친 직후보다 옥탑 시설 높이가 확 낮아졌다. 옥상 난간도 재시공해 윗부분을 잘라냈다. 공사 후 안전 점검에선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받았다. 가장 우려가 컸던 부분은 엘리베이터 설비와 관련된 옥탑 시설이다. 한국승강기안전공단이 최근 실시한 안전 점검에서 ‘추락방지안전장치’ ‘제동’ ‘과속 보호’ 등 모든 항목에서 적합 판정이 나왔다. 김포시청 관계자는 제한 고도 위반과 관련해 “그 부분은 재시공으로 해소가 됐다”며 “공항공사 등 관련 부서에서도 괜찮다는 회신이 왔다”고 말했다.  ━  399가구 주민 입주 막히자 결국 옥상 철근콘크리트 69㎝ 잘라      ━  “잘라내는 게 더 위험” 전문가 지적에도 허가 당국 "원칙대로"     옥상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파트 단지는 “전쟁터 같았다”고들 한다. 8개 동 옥상에서 다 지은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잘라내는 위태로운 작업이 벌어졌다. 15층 아파트 옥상에서 육중한 콘크리트를 철거하는 작업은 위험했다. 잘라낸 철근 콘크리트 덩어리를 지상으로 내리는 작업 또한 고난도다.   지난 1월 현장을 돌아봤을 때 지하주차장에 금속으로 된 기둥을 촘촘히 설치하고 있었다. “주차장 붕괴를 막기 위한 조치”라는 게 현장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거대한 철근 콘크리트 덩어리를 옥상에서 지상으로 운반하려면 초대형 크레인이 필요하다. 크레인 무게에 콘크리트 덩어리 중량이 실리면 자칫 건물이 무너질 우려가 있어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지하 주차장에 ‘잭 파이프’를 촘촘하게 받친 것이다. 다행히 공사는 무사히 끝났다. 새 아파트를 잘라내는 공사로 인해 시공사는 수십억 원의 손해가 예상된다. 대부분 서민인 입주자들은 임시 거처에서 지내야 했다. 제한 고도를 69㎝ 초과했다는 이유로 건물을 훼손하는 건 오히려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관련 당국의 완강한 입장에 공사가 강행됐다.    ━  제한 고도 초과 장애물 즐비해   건설업계에선 “공항 주변에 제한 고도를 초과한 건축물이 엄청나게 많다”는 얘기가 나왔다. 건물이 제한 고도를 초과하면 공항시설법 등 관련 법규에 따라 시공업체 등에 제재를 가하는 건 불가피하지만, 안전 우려가 없는 한 아파트를 훼손한 이번 사례는 잘못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파트 옥상에서 주변을 관찰해봤다. 맨눈으로 보기에 양우내안애 아파트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약간 높아 보이는 아파트도 있다. 김포공항에서 이륙한 항공기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관찰했다. 그런데 모두 양우내안애 아파트와는 상당한 거리가 떨어진 항로로 날아간다. 비행 고도 역시 상당히 높아서 아파트 옥상에 충돌할 위험은 없어 보였다.     ━  1년 동안 당국 뭐 했나   무엇보다 이 아파트가 문제의 높이에 도달한 시점은 이미 1년 전이다. 공항공사는 아파트 건축 허가 당시 “최고 높이 도달 후 7일 이내” 통보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에 따라 시공사가 관련 당국에 공사 현황을 보고했음에도 정밀 측량 등을 통해 안전을 점검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해당 아파트 높이가 항공기 사고 위험을 초래한다면 지난 1년간 김포공항을 이용하는 비행기가 위험에 노출됐다는 얘기가 된다. 공항 주변에 이런 장애물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은 2016년 연구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2015년 기준 김포, 제주 공항 등 7개 민간공항의 경우 약 3000 여개소의 초과 장애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어 있다'는 것이다(박담용 ‘항공안전을 위한 장애물 제한표면 관리시스템의 법·제도적 개선방향에 관한 소고’). 항공법시행규칙 제246조 4항에 따라 장애물 제한표면 구역 내의 모든 장애물에 대해 5년마다 정밀측량을 해 파악한 결과다. 69㎝ 높이를 초과했다는 이유로 지어진 건물을 잘라내야 했다면 3000여개의 장애물이 존재하는 건 어떻게 설명할까. 특히 논문에선 관련 당국의 측량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정밀측량을 재실시한 결과 몇 가지 미흡한 개선 필요사항이 나타났다’며 ‘5년 전에 측량해 추출한 초과 장애물의 현황과 일치하지 않고 차이가 다수 발생한다’고 밝혔다. 항공기 안전을 위한 측량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  논문으로 드러난 공항 안전관리   고도 제한을 어긴 장애물이 3000여개에 이른다는 논문 내용에 대해 한국공항공사 측에 문의했으나 공사 측 관계자는 “박담용 전 안전시설본부장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논문의 내용을 공사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해줄 수 없다”고 답했다. 고도제한 초과 장애물 중 고발이나 시정조치 대상이 되는 기준에 대한 질문에는 “고발 등 조치는 관할 항공청에서 수행하고 있다”고만 답했다. 국토교통부에 같은 내용을 질의한 결과 전국 공항에서 관리 중인 인공 장애물이 3647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지난해 1월 1일 기준) 또한 2022년에만 18건의 제한 고도 초과 장애물 제거 및 고발 조치가 이뤄졌다. “신규 장애물이 축조되거나 발견되면 비행 안전성 여부에 대한 검토도 매년 실시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실정에서 새 아파트가 제한 고도를 69㎝ 초과했다고 비행 안전성 여부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훼손하는 게 적절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  “아파트 훼손 부적절” 지적 이어져   이 아파트가 최고 높이에 도달한 1년 전에 공항공사 측이 안전 문제 확인에 나섰다면 적어도 399가구 입주민들이 한겨울에 임시 거처를 떠도는 상황은 막았을 수 있다. 서울시의 경우 지난해 6월 신월7동 일대 재개발과 관련, 공항공사 측과 협의해 고도 제한을 57.86m에서 66.49m로 완화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문제가 된 경기도 김포의 아파트(58.55m)보다 훨씬 높은 고도다. 곽종근 김포고촌역지역주택 조합장은 “일단 입주를 할 수 있도록 협의를 진행하자고 요청했으나 소용없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이사를 준비 중이다. 인천 강화의 지인 집에서 지내온 임효순(61·여) 씨는 “12일부터 입주가 된다고 하지만 불안한 마음에 14일로 이사를 잡았다”고 말했다. 임 씨는 “이렇게 서민에게 고통을 주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오피스텔에서 지내온 김명렬(74) 씨는 “난방이 잘 안 돼 잠을 잘 자지 못하고 병원에 다녔다”면서 “오는 18일에 이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  1년 전 해당 높이 도달했으나 공항공사 적발 못해 주민 피해   지난 8일 오후 돌아본 아파트는 공사 후유증이 곳곳에 남았다. 단지 내 보도블록은 상당수가 깨졌다. 옥상의 철근 콘크리트 덩어리를 땅에 내리려 대형 크레인을 설치해 작업한 결과다. 바닥에 쓴 ‘119 소방차 전용’ 글씨도 벗겨졌다. 아파트 입구엔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김포시청 관계자는 “12일엔 입주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전문가 “기계적 법 적용 잘못”   서울대 건축학과 박문서 교수는 다 지은 아파트 위쪽을 잘라낸 조치에 대해 “기계적인 법 적용을 통한 잘못된 접근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건축엔 오차 범위가 있는데 법으로만 따지면 해결이 어렵다”며 “건축법 적용은 원칙과 실효성을 담을 수 있는 오픈시스템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운용의 묘를 발휘할 수 있도록 관련 기관들 사이에 협의체를 구성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건설정보모델링(BIM) 기술을 접목해 사업 초기부터 공항 주변 장애물의 저촉 여부를 확인 가능한 체계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너무 높게 지은 아파트 위쪽 싹둑 자른다는데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언제 어디서 칼부림 나도 이상할 것 없는 현실”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강주안의 시시각각] 가짜 뉴스보다 겁나는 거짓 뉴스 [강주안의 시시각각] 추미애·최강욱의 반전 대리운전 지옥 만든 만취청년 '아침 콜'…쥔 돈은 1만6천원 뿐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강주안 논설위원

    2024.03.12 00:32

  •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한·미에 일본·호주 참여하는 '경제적 확장억제' 마련해야"

     ━  김성한 초대 국가안보실장이 보는 외교·안보 정상화 1년   장세정 논설위원 꼭 1년 전 윤석열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협력 파트너'로 규정하고 징용 해법을 제시하면서 전임 문재인 정부 시절 내내 악화일로였던 한·일 관계의 정상화에 물꼬가 터졌다. 국내에서 친일파란 비난을 받으면서도 윤 대통령은 대한해협을 건넜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와 손잡았다. 그리고 지난 1년간 외교·안보 지형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023년 8월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정상회의를 앞두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일 관계가 순항하면서 지난해 4월 바이든 행정부의 뜨거운 환대를 받으며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이 성사됐다. 백악관에서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를 열창했고, 한·미 동맹 70주년의 뜻깊은 해에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박수 세례를 받았다. 한·일과 한·미의 '케미'가 무르익은 덕분에 8월에는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3국의 첫 별도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원칙·정신·약속의 세 문건을 탄생시킨 그 날 만남을 계기로 한·미·일의 협력은 과거 어느 때보다 끈끈해졌고, 단단해졌다.   ■  「 윤 대통령, 한·일 관계 개선 의지 북·중·러 전략적 틈새 활용 필요 북 '두 국가 선언'은 대미 메시지 도발 대비 감시정찰역량 키워야 」   김성한(64)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윤 정부에서 초대 국가안보실장으로 한·미·일 외교 정상화의 밑그림을 그린 전문가다. 윤 대통령과 서울 대광초등 동창으로 오랜 친구이자, 대선 캠프와 인수위에서 외교·안보  분과 좌장을 맡았다. 그는 윤 대통령이 취임한 날(2022년 5월 10일) 용산 대통령실에 들어가 지난해 3월 29일까지 윤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했다. 대통령실과 가까운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숨 가쁘게 전개된 지난 1년의 '외교·안보 대장정'을 돌아보고, 당면한 현안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윤석열 정부의 첫 국가안보실장을 역임한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힘에 의한 평화'와 함께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대북 감시정찰 역량 강화를 강조했다. 우상조 기자  한·일 관계 개선 놓고 내부 격론 벌여  -일본에 손을 내미는 데 대해 격론이 없었나.  "한·일 관계 개선의 필요성에 대해선 용산 대통령실과 관계 부처 모두 공감했다. 다만, 징용 문제의 구체적 해법 및 발표 시점에 관해 이견이 좀 있었다. 국가안보실과 외교부 중심의 고위 당국자들이 내 사무실에서 장시간 토론했고, 때로는 격론을 벌였다. 윤 대통령의 한·일관계 개선 의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속도감 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 한·일 관계 개선은 우리가 피해자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일본과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발상의 전환을 했기에 가능했다."  -기시다 총리 내각의 지지율이 급락했는데, 일본 국내 정치와 무관하게 한·일 관계는 순풍을 탈까.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윤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일본이 한국의 핵심 파트너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가치를 공유하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관계임을 강조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특히 한·일 양국이 ‘새 세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고, 내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계기로 한 단계 도약시키자는 발언은 양국이 협력할 분야가 아주 많은 미래지향적 관계라는 의미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첫 단추를 잘 끼웠으니 앞으로 양국에 어떤 새로운 지도자가 나오더라도 그 단추를 다시 풀고 과거에 입던 헌 옷으로 갈아입으려 할 경우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할 거다." 2023년 3월 16일 일본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하며 악수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일본을 협력 파트너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연합뉴스]    미국 유권자 상대로 공공외교 필요  -한·미 동맹이 굳건해졌지만, 미국 대선이 복병으로 지목되는데.  "과거엔 불편한 한·일 관계 때문에 한·미·일 안보협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일 관계가 개선되면서 한·미·일 안보 협력이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한·미 동맹의 리스크 관리를 위한 환경은 양호하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민주·공화 행정부 모두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이 한·미·일 삼각 안보 협력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바이든과 트럼프의 재대결에서 바이든이 당선되면 한국에 좋고, 트럼프가 당선되면 나쁘다고 단정하는 건 단순논리다. 미국의 정책이 변하도록 하는 것은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미국 유권자다. 미국 유권자들이 한·미 동맹을 꼭 필요하다고 느끼도록 공공외교에 박차를 가할 시점이다."  -꾸준히 제기되는 '트럼프 리스크'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미국 대선 리스크'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 두 가지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 하나는 북한의 위협에 대한 억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하나는 중국 변수 관리를 위해 한·미 동맹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다. 날로 고도화하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억제하는데 현재의 한·미 확장억제 시스템이 충분한지 점검해야 한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강압(coercion)이 재발했을 때 과거 '사드 사태' 때처럼 미국이 수수방관하면서 한국이 미국의 대중 정책에 협조하기를 바란다면 한국이 받아들일 수 없다. 미국이 북핵에 대해 확장억제를 제도화하고 강화하는 것처럼 제3국의 경제적 강압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일종의 ‘경제적 확장억제’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한·미의 긴밀한 협의가 필요하다. 경제적 확장억제는 한·미에다 일본·호주·뉴질랜드 등 역내 우방국과 함께 논의하는 것도 방법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3년 4월 2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 국빈만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노래 '아메리칸 파이'를 부르자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러의 북한 두둔, 한·미·일 협력 자극  윤 대통령이 한·미·일 외교를 정상화하는 동안 북·중·러가 결집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북한은 지난해 9월 북·러 정상회담을 전후해 우크라이나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러시아에 대거 공급했고, 전쟁의 양상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다.  -한·미·일 협력으로 중·러와 불편해졌다는 지적도 있다.  "우리가 한·미·일 안보 협력을 강조하게 된 것은 중·러 때문이 아니라 북한 때문이다. 2022년에 북한은 대화를 거부하고 핵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탈냉전 이후 가장 많은 전략 도발을 했다. 당연히 우리로서는 동맹인 미국, 그리고 우방인 일본과의 연대가 필요했고 3자 협력을 실천에 옮겼다. 그로 인해 중·러가 한국과 멀어졌다고 하는 것은 인과관계를 왜곡한 것이다.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 훨씬 이전부터 중·러는 북한의 도발을 규탄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거부했고, 의장성명 채택조차 외면했다. 북한의 도발과 중·러의 북한 두둔이 한·미·일 협력 강화를 자극한 것이다."  -북·중·러 삼각 밀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한·미·일 안보 협력이 우리 안보의 중심축이지만 중·러를 한꺼번에 멀리할 필요는 없다. 북·중·러 삼각관계가 ‘위험한 삼각형’으로 등장했지만, 이들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보다는 '전략적 틈새'를 잘 활용해 대처할 필요가 있다. 중·러는 동병상련 관계이지만 최근 북·러 밀착을 중국이 그리 달가워할 리가 없다. 한·미·일 입장에서 러시아가 잘못할 경우는 중국을 가까이하고, 중국이 잘못하면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그래야 한·미·일 안보 협력이 더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부터).  북한의 '두 국가 선언'은 전쟁불사론   대한민국 안보에서 최대 골칫거리는 북한이다. 그런데 북한은 최근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대남 전략에 변화를 보였다. 조만간 헌법을 개정해 영토 조항을 빌미로 북방한계선(NLL) 주변에서 도발을 감행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선언을 어떻게 보나.  "민족과 통일을 부정하며 내세운 ‘두 국가 전쟁 불사론’이다.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져 온 민족·평화·통일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역사 지우기’이고, 대남 통일전선전술의 의미를 스스로 부정한 셈이다. 그 지향점은 미국을 향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남북한을 별개 국가로 대하고, 북한의 주권을 존중해주면 미국과 비핵화를 빼고는 모두 협력할 준비가 됐다는 대미 전략적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예컨대 소량의 핵탄두만 인정해 주면 미국을 때릴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포기하고 미국의 동맹국이 될 각오가 됐다는 것이다. 미국의 70년 혈맹인 한국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전략이 미국에 먹힐 것이라 김정은이 생각한다면 순진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의 올해 3·1절 기념사는 두 국가를 주장한 북한에 대해 자유와 통일을 강조함으로써 북한과의 차별성을 극적으로 부각했다. 특히 3·1운동은 남북한 주민 모두가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통일로 비로소 완결된다고 윤 대통령이 강조한 부분의 의미가 크다." 윤석열 정부의 초대 국가안보실장을 역임한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진행한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커졌다며 철저한 대비를 주문했다. 우상조 기자  -4월 총선과 11월 미국 대선을 겨냥한 북한의 도발이 우려된다.  "강력한 한·미 동맹에 의해 김씨 세습 왕조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 분명한 전면전 도발은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닐 것이다. 서해 5도 등지에서 국지도발 및 이로 인한 국지전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국가안보실장 재임 중에 100여 가지 도발 시나리오를 만들어 놨는데, 상상력을 동원해 시나리오를 업데이트하면서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도 도발 가능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국방 혁신과 함께 감시정찰 역량을 대대적으로 배양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안이함이 하마스의 도발을 불렀다. 우리 안보의 기승전결은 ‘기-승-전-감(監)’, 즉 감시정찰 능력 강화다. 비록 북한이 거부하지만, 대화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2024.03.07 00:35

  •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철도 지하화? 유권자들이 앞으로 50년은 보게 될 공약”

     ━  여야 총선 공약 들여다보니   서경호 논설위원 빨간 조끼 ‘공약 택배’ 배달원 한동훈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연일 총선 현장을 찾아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빨간 조끼를 입고 택배 배달원으로 꾸몄다. 정책을 ‘주문’하기만 하면 신속하고 정확하게 ‘배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지난 27일에는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한강벨트’를 찾았다. 더불어민주당 전현희 후보를 상대하는 윤희숙 국민의힘 후보가 출마한 지역이다. 윤 후보는 “저는 임차인입니다”로 시작하는 임대차 3법 반대 연설로 유명하다.     ■  「 재원 방안 부실하고 실현가능성 적은 ‘던지고 보는’ 공약 많아   여당이 공약에 상대적으로 열의…민주당, 공천 갈등에 빛바래   권력다툼만 부각되는 선거 넘어 시민 권리의 우선순위 논쟁해야 」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7일 서울 성동구의 한 북카페에서 기후 미래 스타트업 창업자들에게 기후변화 공약을 담은 ‘기후 미래 택배’를 전달한 뒤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기후대응기금 규모를 올해 2조4000억원에서 2027년 5조원으로 확대하고 22대 국회에 기후위기특별위원회를 상설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민의힘 16호 총선 공약이었다. 흔히 진보 이슈인 기후변화 공약에 보수 정당이 어쨌든 숟가락을 얹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지역과 인물 중심으로 치러지는 총선에서 중앙당 차원의 정책 공약은 대통령 선거보다 덜 주목받는다. 그래도 합리적 중도 성향의 무당층(스윙 보터)의 흔들리는 마음을 정책으로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수도권을 비롯해 치열하게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책 공약은 국민의힘이 상대적으로 열성이다. 지난달 18일 ▶부총리급 인구부 신설 ▶아빠 유급 출산휴가 1개월 의무화 ▶육아휴직 급여 상한 150만원에서 210만원으로 인상 등을 골자로 하는 1호 공약인 ‘일·가족 모두 행복’을 낸 이후 꾸준히 16호 공약까지 냈다. 초등학교 늘봄학교 2학기 전면 시행 등 아이 돌봄서비스 확대(2호), 이자소득세가 면제되는 재형재축 재도입과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비과세 한도 상향(3호), 철도 지하화(4호), 간병비 국가 책임 단계적 강화와 경로당·노인복지관 점심 제공 주 7일까지 단계적 확대(6호), 고위험 성범죄자의 거주지를 제한하는 ‘한국형 제시카법’ 제정(10호), 예비부부·갓결혼부부 대상의 주택 구입용 디딤돌 대출과 전세용 버팀목 대출의 부부 합산 소득요건 완화(12호) 등이 나왔다.   민주당도 같은 날 저출생 공약 발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18일 국회에서 ‘대한민국 생존을 위한 저출생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여당이 아빠 출산휴가 의무화 등 저출생 공약을 낸 지난달 18일, 더불어민주당도 저출생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2자녀 출산시 24평, 3자녀 출산하면 33평 공공임대 주택인 ‘보듬주택’을 제공하며 나중에 분양 전환할 수 있다. 결혼하면 소득·자산 등과 무관하게 가구당 10년 만기로 1억원을 대출해주고 출생자녀수에 따라 원리금을 차등 감면해준다. 3자녀를 출산하면 무이자에 원금 전액을 탕감해준다. 저출생 관련 정책을 종합적으로 수립하고 집행하는 ‘인구위기대응부’ 신설도 추진한다. 도심구간 철도 지하화도 약속했다. 지역의 거점 국립대를 서울대 수준으로 키우는 ‘서울대 10개 만들기’, 양육비 국가 대지급,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도입, 동물복지, 고금리 부담 완화, 근로소득자 세 부담 완화 등 공약 발표가 이어졌지만 당내 공천 파동에 밀려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반면, 정치인 이준석이 이끄는 개혁신당의 정책 공약은 이슈화에 성공했다. 노인의 지하철 무임승차 폐지, 경찰관·소방관 지원 여성의 군 복무 의무화가 대표적이다. 정부의 의과대학 입학 정원 증원에는 반대했다. 이낙연 전 총리가 공동대표를 맡은 새로운 미래는 ‘한국형 모병제’ 도입에 이어 법률혼과 혈연이 아닌 새로운 가족 구성을 단계적으로 수용하는 ‘돌봄중심 생활동반자법’ 제정을 약속했다. 거대 양당의 틈새를 파고들어야 하는 3지대 정당은 정책 공약을 공격적으로 내고 있다.   공약이 계속 나오고 있는 만큼 아직 평가하기엔 좀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아직 재원조달 계획을 포함해 전체 공약을 선관위에 등록하지 않은 만큼 더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통령실 민생토론회 “총선용” 비판   여당의 공식적인 정책 공약은 아니지만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실이 잇따라 민생토론회를 열어 발표하는 일련의 정책도 주목받았다. 야당에서 “총선용”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걸 보면 넓은 범주의 여당 공약으로 볼 여지가 있다. 지방 그린벨트 규제 완화가 대표적이다. 정부의 의대 증원도 국민 공감대가 큰 이슈를 던졌다는 점에서 총선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현안이다.   정당의 총선 공약 자체도 뜯어봐야겠지만 유권자들은 공약에서 정당의 태도와 메시지를 읽는다고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은 분석했다. 정책은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이다. “2012년 총선에서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당명과 당 색깔을 싹 바꾸고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까지 수용했어요. 유권자들이 읽은 박근혜의 메시지는 ‘나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니다. 개방적인 사람이다. 변화하겠다’가 아니었을까요.”   문제는 재원 조달 방안이나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일단 ‘던져놓고 보는’ 공약이 넘쳐난다는 점이다. 간병비 국가 책임 강화와 경로당 점심 제공 확대 등이 그랬다. 실현과정이 쉽지 않거나 재정 부담이 큰 공약에는 ‘단계적’이라는 표현을 슬그머니 집어넣어 ‘도피처’를 마련했지만 그렇다고 정책 신뢰도가 높아지는 건 아니다. 특히 여야가 동시에 내놓은 철도 지하화 공약은 정책 실효성이 의심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도심구간 철도 지하화 비용을 80조원으로 추산(민주당)하면서 여야 모두 민자 유치를 재원 조달 방안으로 내걸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은 “철도지하화 공약은 앞으로 50년 정도는 유권자들이 계속해서 살아생전에 죽기 전까지 보게 될 공약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당의 공약 자체가 덜 주목받는 현실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정치학자 박상훈(국회 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공약은 정당을 책임 정치에 구속시킬 수 있는 시민의 강력한 무기이자 권리인데도 관심을 덜 받는 것은 정당이 시민을 무권리 상태로 만든 것”이라며 “현대 민주주의는 돌봄이나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 등 시민의 다양한 권리의 우선순위를 선거를 통해 정하는데 지금은 전체적으로 누가 누구를 쫓아내느냐는 권력투쟁의 모습만 부각되는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공약을 둘러싸고 이성적인 토론과 논쟁이 없는 점도 아쉬워했다. 그는 지금의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는 총선 공약은 “우리도 공약을 내기는 했다고 면피하려는 ‘알리바이 공약’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 분열, 반사이익, 중도확장이 총선 승패 갈라 「 ━ 『좋은 불평등』의 저자 최병천  최병천 최병천(사진)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은 신간 『이기는 정치학』에서 현재와 같은 양당제가 본격화한 2004년 총선 이후 지금까지 5번의 총선에서 분열, 반사이익, 중도확장이 승패를 가른 3대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지낸 최 소장은 2022년 『좋은 불평등』에서 소득주도 성장과 같은 ‘운동권 경제학’을 비판해 주목받았다.   민주당은 2004년, 2016년, 2020년 총선에서 이겼다. 2004년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반사이익을 봤고, 2016년은 상대방의 분열과 반사이익, 문재인-김종인 비대위의 과감한 중도확장이 결합된 결과라고 했다. 2020년 총선도 세 요인이 다 작용했는데 K방역에 대한 자유한국당(현재 국힘 계열)의 반대와 외신의 찬사로 ‘국뽕 선거’가 됐다고 최 소장은 썼다.   국힘 계열이 승리한 2008년은 노무현 정부 심판(반사이익)과 이명박의 중도실용주의(중도 확장) 영향이 컸고 2012년 역시 민주당의 한·미 FTA 폐기 추진(반사이익)과 박근혜 비대위의 경제 민주화와 복지국가(중도 확장)가 먹혔다. 최 소장은 정책 공약이 큰 역할을 한 특이한 총선으로 2012년 총선을 꼽았다.   왜 그런가. “2012년 4월 총선은 이명박 정부 5년차였다.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정권심판론이 강해진다. ‘참패하기 딱 좋은’ 시점이었다. ‘미래권력’인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전면에 나서 중도확장에 성공했다. ‘민주당스러운 정책’으로 민주당의 중도표를 가져갔다. ‘줄푸세’의 박근혜가 ‘경제민주화’ 박근혜로 변신했다.”(줄푸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는 뜻으로 내세웠던 슬로건이다.)   대통령 선거에 비해 총선에선 정책 공약이 덜 부각되는 것 같다. “정책에 미치는 국회의 영향력이 행정부에 비해 작기 때문이다. 대선에서 이기면 행정부까지 장악하지만 총선에서 이겨도 의회 권력뿐이다. 지방정부까지 공무원은 200만 명이지만 국회는 예산정책처 등 국회 유관기관까지 다 합해도 1만 명이 안 된다. 상근자 숫자가 조직력이고 영향력이다. 그러니 정책 공약의 진실성과 책임성도 떨어진다.”   그래도 정책을 들여다보는 유권자는 있다. “정책 공약은 정당의 공적인 약속이다. 지도자가 누구냐, 지도자가 신뢰받고 있느냐에 따라 정책 공약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박근혜는 아버지 기일에 ‘내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입니다’라는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전략적인 추도사를 남겼다. 실제로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의 각론도 잘 준비돼 있었다.”   정책 수요자인 국민은 어떻게 해야 하나. “보육 등 본인의 삶과 관련된 정책을 보면서 챙길 것은 챙겨라. 좋은 정책에 반응하는 유권자가 많을수록 정당도 정교한 정책을 내놓는다.” 」 서경호 논설위원

    2024.02.29 00:36

  • 북한이 가장 두려워한 김관진 "난 대한민국이 있어 행복하다" [김현기 논설위원이 간다]

      ■ 특별사면 김관진 전 국방장관의 심경 토로 「 국가 헌신이란 군인의 마음가짐 싹 부정되는 게 힘들었다 군 체계 혁명 가져올 AI 기반의 과학 강군 육성 이뤄내겠다 북한, 총선 전 '전쟁이냐 평화냐' 남남갈등 도발 가능성 짙어 박근혜 회고록은 진실을 말해...억울하게 옥살이했다 생각   」      김현기 논설위원 "저런 눈뜬 소경들에게 안보를 맡기고 막대한 혈세를 섬겨 바치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참 불쌍하다. 차라리 청각, 후각이 발달한 개에게 안보를 맡기는 것이 열 배는 더 낫다." 얼마 전 북한군 포사격 직후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한국에 내놓은 원색적 비난 속에 '개'가 등장한 걸 들으며 새삼 떠올린 인물이 있다.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74).    김관진 국방혁신위원회 부위원장이 20일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2013년 북한 대남선전 매체는 당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의 가면을 쓴 인형을 등장시켰다. 그리곤 북한 군견들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물어뜯게 했다. 이처럼 북한은 눈엣가시를 제거하는 해결사로 '개'를 등장시키곤 했다. 북한이 얼마나 김관진을 무서워하고 껄끄러워했는지 알 수 있다.  북한의 대남 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가 2013년 공개한 김관진 당시 국방부장관을 겨냥하고 실시한 훈련 모습. [사진 우리민족끼리]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북한의 도발은 끊이질 않는다. 최근 한 달 사이 다섯번의 미사일 도발이 있었다. 서해 5도에선 긴장 수위가 높아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선 북한제 무기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이런 북한의 움직임에 대해 북한이 가장 두려워했던 김관진 전 장관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궁금했다. 또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무려 6년 8개월 동안 무자비할 정도의 수사와 재판을 겪으면서 느낀 소회를 듣고 싶었다.    김 전 장관은 공직 재임 중에도 그랬지만 언론과의 인터뷰에 거의 응하지 않았다. 특히 지난 6일 특별사면 후에는 인터뷰와 강연 요청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쇄도하지만 사양하고 있다고 했다. 김 전 장관은 "지난해 5월부터 (부위원장을) 맡은 국방혁신위원회 일이 너무 많고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20일 찾아간 그의 사무실에는 이순진 국방혁신위 특별자문위원(69·전 합참의장)도 있었다, 투철한 애국심과 강한 리더십으로 '작은 거인'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화제는 AI(인공지능) 기술부터 드론에 이르기까지 넓고 깊었다. 김 전 장관은 장관 재임 중 '이 시간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를 늘 고민하며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기 위해 집무실에 김정은과 북한군 수뇌부의 사진을 걸어두었다고 한다. 대신 이제 그의 사무실 벽에는 '국방혁신으로 과학기술 강군 육성'이란 휘호가 걸려 있었다. 세월이 지나도 영원한 군인이란 느낌이 들었다.    ━  AI를 군의 정보참모 겸 작전참모로    추진 중인 '국방혁신 4.0'의 핵심 과제는 AI를 기반으로 한 과학 강군 육성이라는데, 쉽게 예를 들자면. 쉽게 말해 드론 로봇 군대를 만들고, 최전선에 유·무인 복합 전투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앞으로는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거나 혹은 선제타격을 가할 때 AI가 어떤 탄약으로 어디에 어느 사거리의 탄약을 어느 정도 쏟아부으면 될지 데이터를 제공해주는, 말하자면, 정보참모와 작전참모의 역할을 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택시를 부르는 앱이라 생각하면 된다. 삼각지에서 상암동을 간다고 하면 먼저 앱을 열고 목적지 입력을 하면 주변에 있는 택시 중 가장 가까이 있는 적합한 택시가 매칭되고 자동결제가 이뤄지지 않느냐. 마찬가지로 적이 식별되면 아군의 대전차 미사일이나 드론의 위치를 실시간 체크해 바로 연결해 준다. 이 결정까지 기존 20분 걸리던 게 1분으로 단축된다.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군 체계가 완전히 달라지는 혁명이 이뤄진다.    금방 현실화될 수 있나. 그렇다면 북한군의 AI 수준은 어는 정도인가. 예전부터 과학기술강군 구호는 있었지만, 현재처럼 실질적으로 국방혁신을 추진한 적은 없었다. AI기반 과학기술강군 육성은 한 번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계화하여 추진하고 있으며, 현재는 기반체계 구축과 각 군 시범부대를 운용중에 있다. 참고로 작년 과학화전투훈련단(KCTC)에서 실시한 아미타이거여단의 전투 모의실험 결과, 기존 부대보다 훨씬 더 강한 부대가 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북한군은 아직 드론을 제외하곤 현실적으로 AI를 활용할 여건은 안 된다고 본다. 다만 AI-드론-로봇이 결합하려면 인공위성이 필요한데 북한도 지난해 인공위성을 최초로 발사하면서 감시정찰 능력을 획기적으로 향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20일 윤석열 대통령이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방혁신위원회 3차 회의에 입장하며 김관진 국방혁신위 부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방혁신위 부위원장을 맡기면서 특별히 당부한 부분은.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국방혁신을 획기적으로 강화해달라, 그리고 4차 혁명의 시기에 부합하는 새로운 전쟁의 양상에 대비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소프트웨어가 6개월에서 1년이면 계속 업데이트되는 시대다. 군사무기체계가 우리의 경우 평균 14년이 걸리는데 이를 절반인 7년 안에 완성될 수 있도록 국방획득체계를 획기적으로 혁신해달라고 말씀하셨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윤 대통령처럼 국방혁신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고 선두에서 이끌어가는 분은 없었다.       군의 첨단화도 좋지만, 군의 사기와 마음가짐도 문제 아닌가.  맞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싸우겠다는, 승리하겠다는 자신감이 더 중요하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수가 있겠어?" '우린 한미동맹이 있잖아'라 안심해버리면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은 무기력해진다. 그래서 군은 전투력 향상에 매진해야 한다. 드론과 AI가 있어도 그런 정신적 부분이 없으면 이기기 힘들다.    인구절벽 위기에 따른 병력 부족 현상도 국방혁신위 구성의 한 원인이 됐다. 그렇다면 저출산 고령화에 맞춰 실버 아미(55~75세의 재입대) 도입 혹은 모병제 구상은 어떤가.  인구절벽 문제에 따른 여러 리스크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50~60대들은 위기 대응 능력이 상당히 체계적이다. 다만 상명하복, 동원체계 등 문제점도 있다. 또 모병제를 채택한 국가 중 전투능력이 뛰어난 국가가 거의 없다고 본다.     김관진 국방혁신위원회 부위원장이 20일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에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발언하는 모습. 김현동 기자 초급장교 복무여건 및 전술제대 지휘관(대대장~사단장)들의 지휘여건 개선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임관 5년이 안 된 초급 간부들은 군 최전방 전력의 핵심이면서도 낮은 보수와 잦은 비상대기로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게 사실이다. 사관학교 생도들의 자퇴율도 증가하고 있고, 학군 사관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율도 급감하고 있다. 작년에 시간외근무수당 확대, 당직 근무비 인상 등의 성과가 있었지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야전에서 전술제대 지휘관들이 전투임무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복무여건을 개선하는 것 또한 시급한 과제다. 신성한 국가방위 임무를 수행하는 지휘관들에게 국가가 오직 개인의 희생만을 더 이상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휴일없이 항상 대기하는 긴장감과 병력관리의 어려움, 전투준비를 위한 예산 부족 등 지휘관만의 고충과 애로사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국민적 관심과 정치권의 지원이 절실하다.       ━  총선 앞두고 북한 도발 가능성 크다   북한의 도발이 진짜 전쟁할 생각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한국을 교란하려는 의도인지.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 중 가장 결정적인 건 지도자의 성격이다. 얼마나 조급한가, 공격적인가에 따라 다르다. 전쟁을 결심해버리면 끝나는 것이다. 북한의 경우 내부적으로 여러 문제가 있어 도발을 통해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는 측면이 있다. 다만 문제는 그 도발에 대응하고 응징하고, 또 거기에 도발하는 과정에서 전면전으로 갈 수도 있다. 그래서 전쟁이라는 것은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북한은 핵무기를 갖고 있어 강하게 도발하면 우리가 제대로 대응 못 할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북한의 도발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응징하지 못한다면 북한의 도발은 한층 더 심각해질 것이다.   북한은 과거에도 선거를 앞두고 남남 분열을 노린 도발을 했는데.    북한은 늘 선거에 개입해왔다. 뚜렷한 전략적 목적, 심리적 목적을 갖고 있다. 전쟁이냐 평화냐의 논리로 한국 내부의 갈등을 일으키려 했다. 이번 총선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북한은 우리가 도발 주체를 판단하여 즉각 대응하기 모호한 방법으로 도발할 것이다. 과거에는 북한이 도발하면 보수 정권에 더 유리했지만, 이제는 그런 도발을 통해 군의 국가안보 태세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초래하고 '전쟁이냐 평화냐'의 프레임으로 남남갈등을 조장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5년 8월 22일 북한의 포격도발로 인한 대치상황과 관련해 열린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우리측 대표인 김관진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홍용표 통일부 장관, 북측 대표인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양건 노동당 대남비서가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통일부 서해5도가 매우 불안하다고들 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최근 '해양국경선'이란 단어도 썼는데.   북한은 전에부터 우리 북방한계선(NLL) 훨씬 남쪽으로 자기네들의 경계선을 주장해 왔다. 다만 해양국경선이란 단어를 쓴 건 처음인 것 같다. 우리는 서해5도 NLL을 1인치도 내줄 수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주장했던 NLL에서 1mm라도 더 북한군이 넘어오면 우리 군이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매우 잘 대응하고 있다고 본다.     많은 군인들이 김 전 장관을 존경하고 따른다. 평소 '창을 베고 적을 기다린다'는 ‘침과대적(枕戈待敵)’의 자세를 부하들에게 강조했는데.  올바른 국가관, 대적관, 그리고 필승 군인정신의 신념화가 필요하다. 미래에 대한 준비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 아무리 전력이 잘 갖춰져 있어도 이를 실 전투력으로 승화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국민도 군에 성원과 신뢰를 보내줬으면 한다. 얼마 전 시민들이 휴가 나온 장병에게 식사와 커피값을 대신 내줬다는 기사를 봤다. 사실 군은 사기를 먹고 자라는 집단이다. 고개 숙인 군은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다. 국민이 보내는 작은 응원이 초급간부를 비롯한 군 장병들에겐 기쁨과 자부심이 된다. 당연히 군은 확고한 국가방위로 이에 보답해야 한다. 지난 2010년 김관진 신임 국방부장관이 연평도를 방문, 북한 포격으로 불에 탄 민가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은 유독 '김관진 공격'에 혈안이었다. 군견이 '김관진 인형'을 물어뜯는 사진도 공개했는데 당시 어떤 느낌이었나.  북한에선 그렇게 하면 내가 굴복할 거로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난 그 모습이 방영된 이후 더 강해졌다. 더 굽히지 않고 더 세게 북한을 압박했다. 그즈음 해병대 사령관이 내게 와서 북한 전단에 5적인가 6적인가가 나오는데, 거기에 나뿐 아니라 자기도 포함됐다며 아주 자랑스럽다고 하더라. 그게 바로 우리 군의 정신이다. 내가 북한의 테러 타깃이 돼 기자들에게 '내 옆으로는 오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웃음).   북한군이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의 얼굴 사진을 놓고 사격 훈련을 하는 모습. [사진 우리민족끼리]  ━  짜맞추고 몰아간 수사, 진실·진심을 왜곡    문재인 정부 들어서자마자 시작된 수사와 재판이 무려 6년 8개월 걸렸다. 전체 혐의 7가지 중 5가지(차기 전투기 기종 결정, 제주 해군기지 정치중립 위반, 계엄령 문건, 세월호 유족 사찰, 사드 추가반입 보고 위반)가 수사단계에서 무혐의 처분되고 세월호 조작 혐의도 무죄가 났다. 그리고 사이버 사령부 군 댓글 사건만 구속, 적부심 석방, 재영장 청구, 기각, 파기환송, 상고 포기 등을 거쳐 지난 6일 특별사면됐다. 이 긴 세월 동안 무엇이 가장 억울했는가. 사실 이건 북한의 사이버 심리전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댓글을 통해 사이버 심리전을 한 것이다. 그게 정치에 관여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안 듣더라. 이미 정치적으로 목표와 결론을 정해놓고 짜 맞춰 몰아갔다. 원래 군인은 다시 태어나도 제복을 입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법인데, 그게 싹 부정되는 것이 안타깝고 힘들었다. 진실과 진심이 왜곡됐다.      2018년 이후 출석한 재판만 50차례 가까이 된다. 그 힘든 세월을 지탱하게 한 힘은 무엇이었나. 우국충정의 마음 하나다. 난 군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역시 날 평가하고 응원해주는 군 선후배, 국민으로부터의 편지와 메시지가 큰 힘이 됐다. 그들의 격려와 응원의 편지를 읽으면서 6년 8개월을 참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지난 2019년 11월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이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작년 7월 파기환송심 결심 공판 때 최후 진술이 인상적이었다. "난 육사 입교 이래 46년간 나라를 지키는 일에 몰두했다. 강한 군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군대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지킬 수 있는 나라가 있어 행복했으며 발전하고 있는 조국 대한민국에 있어서 큰 보람이 있었다. 뜻하지 않게 정치 관여라는 죄목으로 피고인이 돼 오로지 적과 싸워 이기는 군인다운 군인이 되고자 했던 나의 삶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됐다. 나와 비슷한 이유로 피해받는 후배들이 더는 나오지 않기 바란다." 어떤 기분에서 그랬나. 지금 읽은 그 내용 그대로의 기분이었다. (웃음). 책임은 내가 다 진다는 그런 생각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초급장교 소위 때 전방 철책선에서 경계를 서고 있을 때 왔다 갔다 하던 토끼조차 북한에 넘어가지 않도록 애썼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 토끼가 북으로 갔으면 어떻게 됐겠는가. 나는 대한민국이 있어서, 대한민국에 있어서 행복했다.    ━  박근혜 회고록은 진실을 말했다    이달 초 대구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북 콘서트에 참석했다. 어떤 생각이 들었나. 내가 국가안보실장 할 때 곁에서 보면 굉장히 진솔한 분이고 애국심이 강한 분이었다. 사리사욕을 위해 뭘 한다는 것은 아예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철저한 분이었다. 참 억울하게 옥살이까지 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회고록은) 국민에게 정확한 것을 일깨워주기 위한 목적에서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5일 박근혜 전 대통령(왼쪽)이 대구 수성구 인터불고호텔에서 열린 '박근혜 회고록 출간기념 저자와의 대화'가 끝난 뒤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건강은 어떤가. 허리가 좀 안 좋고 지병도 있지만, 국방혁신을 통해 강한 군을 만들어 간다는 생각에 엔도르핀이 돈다. 보람과 즐거움을 갖고 임하고 있다. 김현기 논설위원

    2024.02.27 00:34

  • [김정하 논설위원이 간다] “선거구획정위 권한 강화해 한국 정치 고질병 끝내자”

     ━  4년마다 반복되는 선거구 획정 지연 사태   김정하 논설위원 4·10 총선이 다가오면서 요즘 여야가 매일 지역구 공천자 발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공천자 명단은 모두 무효다. 아직도 국회가 선거구 획정을 완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국회는 총선 1년 전에 선거구를 획정해야 한다. 하지만 1년 전은 고사하고 선거가 임박해서야 허겁지겁 선거구를 확정하는 건 한국 정치의 고질병이다. 2012년 총선은 선거일 D-44에, 2016년 총선은 D-42에, 2020년 총선은 D-39에 선거구획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갈수록 늦어지는 추세이니, 이번 총선은 선거구 획정의 늑장 신기록을 세울지도 모른다.     ■  「 “선거 1년 전 획정” 규정 사문화 획정 늦어질수록 현역만 유리   국회 손놓고 있다 벼락치기 요구 21대 획정위원 “사실 졸속” 토로   획정위가 시·도 의석 결정하고 선거 6달 전 자동 확정되게 해야 」    국회의장은 지난 19일 국회 본회의에서 “선거 6개월 전까지 선거구를 확정하지 못하면 선거구획정위 제출안을 그대로 확정하도록 법에 규정하자”고 제안했다. [뉴스1] 선거구 획정이 지연되면 지명도 높은 현역 의원이 유리하고, 정치 신인은 이름을 알릴 기회가 줄어들어 불리해진다. 국회가 선거구 획정을 서두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또 출마를 선언했다가 뒤늦게 선거구가 조정되면서 지역구가 사라져 출마를 못 하는 황당한 사례까지 생겼다.   2016년 헌법재판소는 국회가 선거구 개정시한을 넘겨 선거구를 획정한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심판 청구를 재판관 5(각하) 대 4(위헌) 의견으로 각하하면서도 “국회는 선거구 공백 상태를 초래했고 선거운동의 자유가 온전히 보장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당시 헌재는 이미 선거가 끝났다는 이유로 청구를 각하했지만, 위헌 의견이 4명이나 나온 것은 실질적으로 위헌 결정이나 마찬가지란 평가가 나왔다.   4년 전 획정위원들의 고백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폐단에 대해 비판 여론이 비등하자 국회는 2015년 선거구 획정을 여야 협상이 아니라 선거구획정위원회라는 독립기구에 맡기는 방안을 도입했다. 그런데도 늑장 행태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이유가 뭘까. 현 선거구획정위 멤버들을 접촉해 얘기를 들어보려 했으나 아직 여야 물밑 협의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전부 인터뷰를 고사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4년 전 21대 총선 때 선거구획정위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에게 속사정을 들어봤다. 사실 그사이에 환경이 달라진 게 거의 없기 때문에 이들의 진단은 현 상황에도 그대로 통용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4년 전 선거구획정위에서 활동했던 지병근 조선대(정치외교학) 교수와의 일문일답.   선거구획정위를 설치해도 국회의 늑장 관행은 별로 개선된 게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선거구 획정 작업을 시작하려면 먼저 광역단체별 의석수가 할당돼야 한다. 그런데 현행법상 광역단체별 의석수를 누가 정할 건지 권한의 법적 소재가 애매하게 돼 있다. 현실적으론 국회가 정할 수밖에 없는데, 국회가 그 부분을 손 놓고 있으면 획정위가 아무리 일찍 구성돼 봤자 구체적인 일을 진행할 수가 없다.”   획정위의 권한이 부족한 것인가. “그렇다. 실무적인 부분에서도 애로가 있다. 현 선거법은 선거구 획정시 자치시군 경계를 임의로 변경할 수 없도록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정략적 의도에서 행정구역 일부만 떼어 내 다른 구역과 합치는 게리맨더링을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부 분할 금지’ 규정 때문에 획정위가 선거구를 조정할 때 작업이 너무 경직되는 측면이 있다. 가령 4년 전에 인구증가로 전남의 순천을 분구해야 했는데, 저 규정에 묶여 전남의 거의 모든 선거구를 뜯어고쳤다. 하지만 그 안을 국회에 제출했더니 국회는 순천과 다른 지역의 일부를 통합하는 예외를 도입해 전남 전체 선거구 조정을 최소화했다. 획정위에도 그런 예외를 도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면 좋을 것이다.”   획정위 활동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인가. “획정위에서 광역단체 의석수를 빨리 정해달라고 계속 국회에 요청했는데도 여야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더니, 선거가 다가오니까 그제야 갑자기 1주일 시간 줄 테니 빨리 선거구 획정하라고 요구하더라. 이건 너무 폭력적 방식이라는 생각에 화가 나더라. 당시 획정위원들이 시한에 맞추려고 엄청 애를 먹었다.”   현행 규정에 따르면 획정위가 선거구획정안을 국회에 내면 국회는 1차에 한해 수정요구를 할 수 있고, 획정위가 수정안을 내면 국회는 지체 없이 수용하게 돼 있는데. “그 부분도 법적으로 허술하다. 가령 국회의 수정 요구에 대해 획정위가 ‘획정안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버티면서 수정안 제출을 안 하면 어떻게 될지 명확한 규정이 없다. 극단적 가정이지만 획정위가 수정안 제출을 질질 끌다가 막판에 위원들이 일괄 사표를 던지면 선거를 못 치를 수도 있다. 또 선관위가 수정안을 냈을 때 국회가 또 거부하면 그 뒤엔 어떻게 되는지도 모호하다. 보완 입법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1년 전 확정 규정 어기면 페널티 줘야”   김영옥 기자 22대 총선 선거구획정위는 지난해 12월 5일 서울 노원 갑, 을, 병을 갑, 을로 통합하고, 전북에선 4개 선거구를 통합해 정읍-순창-고창-부안, 남원-진안-무주-장수, 김제-완주-임실의 3개로 조정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획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대신 인천과 경기는 1석씩 증가한다. 선거 1년 전이란 법정시한을 크게 어겼지만 이마저도 여야의 늑장처리를 보다 못한 김진표 국회의장의 재촉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획정위의 안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이 자신들의 강세 지역에서 선거구가 2개 주는 것은 수용할 수 없다고 반발하면서 아직 확정을 못 하고 있다. 결국 22대 획정위도 밤샘 초치기를 할 가능성이 커졌다. 조정 대상으로 거론되는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들은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노심초사하고 있고, 유권자들도 혼란스럽다.   21대 총선 선거구획정위 멤버였던 윤광일 숙명여대(정치외교학) 교수는 “막판에 시간이 워낙 없으니 선관위 실무팀이 조정대상 선거구마다 A안, B안을 올리면 획정위원들이 그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며 “선관위의 양심과 전문성을 믿긴 하지만 A·B안이 법에서 규정한 생활문화권, 교통, 지리적 여건 등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지, A·B안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지 차분히 검증할 여유가 없더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4년 전 최종 획정안은 시간을 일주일 정도 줬는데, 실제로는 딱 이틀 밤샘 작업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사실 졸속이라고 비판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고 털어놨다. 윤 교수와의 문답.   과거엔 선거구획정위원끼리 충돌이 심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20대 획정위 때만 해도 정당 추천 인사들이 있어서 획정위 내부에서 여야의 대리전이 벌어졌다고 들었다. 그러나 21대 획정위부턴 정당 추천제를 없애고 학계·법조계·시민단체 등으로부터 추천받은 인사들로 위원회를 구성해 정파적 갈등 상황은 크게 줄었다.”   선거구 논의 때 외부 압력은 없나. “사실 꽤 있다. 각 당에서도 연락이 오고 조정 지역으로 거론되는 선거구 관계자들도 전화가 온다. 위원들이야 최대한 원칙대로 하려고 하지만 물밑에서 그런 연락을 받으면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현행 선거구 획정제도에 개선점을 제안한다면. “선거법에는 총선 1년 전에 선거구를 획정하라고 돼 있지만 한 번도 지켜지지 않는 건 의원들이 어겨도 아무런 페널티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획정시한을 어기면 불이익이 돌아가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 또 획정위의 결정 권한을 강화해 정치권 눈치를 안 보고 소신껏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 지금은 선수가 경기규칙을 직접 만드는 꼴 아닌가. 획정위에 광역시·도 의원 정수를 결정할 권한만 부여해도 획정 절차가 크게 빨라질 것이다. 선거구 획정위원들이 4년마다 계속 바뀌기 때문에 전문성이 축적되지 않는 것도 풀어야 할 문제다.”   획정위 독립성 강화 요구 커져   이와 관련, 김진표 의장은 19일 임시국회 개회사에서 “선거제와 선거구 획정을 두고 4년마다 반복되는 파행은 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하는 일”이라며 “선거구 획정 기한을 현행 선거일 전 1년에서 6개월로 현실화하고 6개월 전까지 확정하지 못할 경우 선거구획정위가 제출한 획정안 그대로 확정하도록 법에 규정하자”고 제안했다. 학계의 의견도 선거구획정위의 독립성과 권한을 더욱 강화하자는 쪽으로 모인다.   이재묵 한국외대(정치외교학) 교수는 “현행 선거법엔 시·도별 의석수를 누가 결정할지 규정이 없어서 획정위가 법정시한을 계속 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앞으로는 시·도별 의원정수 확정 권한을 획정위에 부여하고, 선거일 6개월 전까진 자동적으로 획정안이 정해지는 방향으로 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하 논설위원

    2024.02.22 00:43

  • [세컷칼럼] 건축왕에 최고형 선고했지만…전재산 날린 피해자, 얻은 게 없다

    전세 사기 광풍, 그 이후   지난해 전국이 전세 사기로 몸살을 앓았다. 전세왕·건축왕·빌라왕·빌라의 신·빌라왕자….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듯 별의별 왕 이름이 붙은 사기 사건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피해자가 수만 명을 넘어가자 민심이 술렁였고, 개인 간 거래라며 방관하던 정부는 강력한 수사와 함께 대책 마련에 나섰다.    지난해 인천 건축왕 전세사기로 2700여 세대가 피해를 봤다. 이중 4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4월 피해 아파트 베란다에 전세사기 피해를 호소하는 현수막이 붙었다. 연합뉴스  인천 미추홀구는 지역 단위로 발생한 전세 사기 사건 중 서울 강서구와 함께 최대 규모의 피해를 본 곳으로 꼽힌다. 피해자 2700여명, 피해액은 2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4명이 지난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비극적인 열풍과 수사, 전세사기피해자지원특별법을 포함한 정부의 지원책까지 숨가쁘게 쏟아지며 한 해가 지나갔다. 하지만 다시 새해를 맞은 시점에도 피해자들의 사정은 그리 달라진 게 없었다. 인천 미추홀구를 중심으로 전세 사기 열풍 이후를 점검해봤다.   보증금 기약 없는데 유지·관리 이중고    미추홀구는 북쪽으로 국철 1호선이 관통하고, 수인분당선과 인천2호선이 각각 동북쪽과 남서쪽을 지난다. 몇몇 재개발 지역에서 대규모 아파트 신축 공사가 진행중이지만 대부분 빌라와 나홀로 아파트들로 채워진 곳이다. 교통은 편리한데 전셋값은 낮아 수도권에서 직장을 잡은 신혼부부나 독신 청년들이 대거 몰린 곳이다.   ■  「 인천 미추홀구, ‘건축왕’ 전세사기에 2700여 세대 피해 발생 경매 중단됐지만 건물 유지·보수 손 못대, 삶의 터전 붕괴중 우선매수·LH매입 등은 효과 못내…특별법 개정은 ‘논란중’ 남헌기 징역 15년,‘범단’ 인정돼도 더 안늘어… 환수도 미미 」     이곳에서 ‘건축왕’ 남헌기씨가 기업형 전세 사기를 벌였다. 빌라 몇 개를 모아 재건축 형식으로 1~3개 동의 아파트를 지은 뒤 공인중개사를 끼고 매매가보다 높은 가격에 전세를 놓았다. 초기 자금은 차입으로 해결했기에 건물은 모두 금융기관 선순위 담보로 제공됐다. 이 빚을 전세보증금으로 해결한 뒤 다시 돈을 빌려 비슷한 아파트를 짓는 식이다. 그러다 금리가 오르고 전셋값은 떨어지며 이자를 갚지 못할 형편에 이르자 건물들이 경매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세입자들은 대부분 후순위여서 보증금을 거의 받지 못한 상태다.   인천 미추홀구의 S아파트 외벽이 심한 비바람에 떨어져 나갔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관리비가 묶인채 수리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진 독자제공  도원역부터 제물포·도화·주안 ·간석역까지 1호선 라인을 따라 남북으로 늘어선 나홀로 아파트와 빌라들이 대부분 피해 주택이라고 했다. 설 명절을 한 주 앞둔 지난 2일 찾아간 주안역 부근 S아파트에는 필로티 구조의 1층 주차장 한켠에 콘크리트 잔해가 잔뜩 쌓여있었다. 심한 비바람에 외벽 마감재가 떨어져 내렸지만, 보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떨어진 외벽에 맞은 연통이 빠져 가스보일러를 틀 수 없게 된 세대도 있었다. 낙하물에 맞아 파손된 차량 보상도 바라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 아파트에 사는 강민석 씨는 “대부분의 세대에서 누수로 천장이 부서지거나 벽에 곰팡이가 끼고 물이 올라와 바닥재가 다 들뜨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지만 수리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전했다. 제물포역 인근 H아파트는 인도를 주차 차량이 온통 점령한 상태였다. 주차타워가 고장 나 사용할 수 없게 된 탓이다.  사기범 남씨는 하늘종합주택이란 관리회사도 차려 세입자로부터 꼬박꼬박 관리비를 받아갔다. 그런데 이 돈 일부를 횡령하고 남은 돈도 묶이면서 큰돈이 들어가는 유지·보수는 전면 중단된 상태다. 관리업체를 믿을 수 없게 된 주민 일부가 관리비 납부를 거부하자 전기료 연체를 이유로 관리업체가 배전반을 무단으로 뜯어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건물 유지·보수 문제는 전세 사기가 발생한 다른 도시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난해 11월 서울 강서구청이 전세 사기 피해자 355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한 결과 70.3%가 건물 유지보수 문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보증금 회수는 막막한데. 사건이 장기화하면서 피해자들의 삶의 터전이 서서히 붕괴하고 있었다.   숨통은 트였지만, 구멍 큰 특별법  미추홀은 피해 규모도 크지만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집단 대응을 하기 시작한 곳이다. 그 중심에 안상미(45) 씨가 있다. 그는 2020년 미추홀구 숭의동 H아파트에 보증금 7200만원의 전세로 입주했다. 한차례 계약을 갱신한 직후인 2022년 7월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통보를 받았다. 두 동짜리 아파트 100여 세대가 모두 같은 처지였다. 변호사비를 아끼기 위해 공동대응에 나섰는데 인천지역 피해자 대책위원회로 발전했고, 도시별 연합체인 전국 대책위도 책임지게 됐다. 대책위가 활동하던 지난해 6월 특별법이 제정됐다. 특별법은 ▶피해자 인정 ▶경(공)매 중단 ▶우선매수청구권 인정 ▶LH 매입 후 재임대 ▶금융지원 등이 골자다. 지난달 기준 전세 사기 피해지원위원회가 공식 인정한 피해 가구 수는 1만 944채에 이른다. 이들이 신청할 경우 법원은 일단 경매를 중단한다. 당장 거리로 나앉는 걱정은 일단 면했다.  특별법에 규정된 경매 유예는 최장 1년까지다. 그런데 올해 들어 다시 경매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지난달 말부터 인터넷 커뮤니티에 빨간 딱지로 도배된 지역별 경매현황 지도가 나돌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이 대표적인데, 미추홀 역시 위험 반경에 들었다. 인천 건축왕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 현관 입구에 경매 참여 불참을 요청하는 호소문이 붙어있다. 지난해 6월 전세사기피해지원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피해자 요청이 있을 경우 법원은 경매를 중단하지만, 시한은 최대 1년이다. 최근 서울 강서구 화곡동을 비롯한 피해지역에 경매 물건이 쏟아지고 있고, 인천 미추홀구에서도 경매가 진행될지 여부에 피해자들이 불안해 하고 있다. 최현철 기자    우선매수청구권도 효과가 있을지 불투명하다. 법에 청구권을 부여한다고만 돼 있고 언제,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세부사항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일단 경매가 진행돼 누군가 낙찰을 받으면 그 가격에 청구권을 쓸지 결정해야 한다. 그나마 서너번 유찰이 돼 경매가가 내려가야 시세와의 차액으로 보증금을 어느 정도 벌충할 수 있다. 그 전에 낙찰되면 청구권을 써봐야 짐만 떠안는 셈이다. 최근엔 경매꾼들이 붙으면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진다고 한다. 안 위원장은 “전세 사기 피해자의 집은 제발 입찰을 피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나마 경매 낙찰금을 낼 수 있는 피해자는 극히 일부다. 보증금이 전 재산인 대부분의 피해자는 LH의 매입 후 재임대에 기대를 걸었다. 주변 월세의 35~50% 수준에서 최장 20년까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홍보는 거창했지만 정작 지금까지 매입이 이뤄진 곳은 한 곳에 불과하다. LH가 매입하려면 서류상 하자는 없어야 하는데, 피해 아파트 특성상 도면과 실제 구조가 다르거나, 허가와 다른 용도로 쓰이는 곳이 많아 번번이 매입을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안 위원장은 “매입이 안 되면 다른 임대주택을 내준다고 하지만, 그곳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 끼어들기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남은 희망은 특별법 개정이다. 지난해 말 야당 단독으로 상임위를 통과했는데, 정부와 여당이 반대해 법사위에 묶여 있다. 핵심 쟁점은  '선구제 후구상' 방안. 사인 간 거래에서 발생한 피해를 세금으로 메워줄 수 없다는 논리는 넘기 힘든 벽이다. 피해자들은 "건설사들의 PF 부실은 지원하면서 서민들의 전세 피해는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은 차별"이라고 주장하지만, 법이 개정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법정 최고형이 남긴 과제  미추홀을 둘러보고 며칠이 지난 7일, 인천지방법원 형사 법정 324호실에선 남 씨 일당에 대한 선고가 있었다. 30석 남짓한 법정은 피해자들로 가득 찼고, 좌석 뒤쪽이나 옆에서 서서 듣는 방청객도 많았다.  재판장인 형사1단독 오기두 부장판사는 형량 선고에 앞서 재판부에 접수된 피해자들의 사연을 읽었다. 사회에 나오자마자 파산한 스물 여섯살 청년, 365일 야간작업하며 받은 200만원 월급을 날린 가장, 딸 결혼식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자살을 시도한 아버지…구구절절한 사연이 법정을 채우는 동안 뒤쪽에선 울음과 한숨 소리가 퍼져나갔다. 2월 7일 인천지방법원에서 건축왕 전세사기범 남헌기씨에게 징역 15년이 선고된 뒤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유정 인턴기자    이날 오 부장판사는 남 씨에게 징역 15년, 나머지 일당들에게 4~13년을 선고했다. 사기죄는 최고 형량이 징역 10년이다. 범행이 여러 건이면 절반까지 가중할 수 있다. 대검찰청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1299명이 전세 사기 혐의로 기소됐고, 이 중 358명은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최근 주범들에게 속속 법정 최고형이 선고되고 있다. 하지만 단일 사건 피해자가 1000명이 넘고 대부분 피해 회복이 안된 점을 고려할 때 충분치 않다는 지적이 많다. 오 판사가 형량 선고 후 별도로 “현행법은 악질적인 사기 범죄를 예방하는데 부족하다”고 덧붙인 이유다.  남 씨는 다른 재판부에서 범죄단체구성죄에 대한 재판도 받고 있다. 인천지검 관계자는 “'범단' 혐의가 인정되더라도 더는 형량을 높일 수는 없지만, 범죄수익금 추적과 환수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1개 조직이 범단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환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기사 취재에 이유정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   글=최현철 논설위원 그림=심혜주 인턴기자

    2024.02.15 23:00

  • [강찬호 논설위원이 간다] 사전투표지 공무원 도장 못받고, ‘바지사장’ 위원장 그대로

     ━  총선 56일 앞두고도 현안 못 푸는 선관위   강찬호 논설위원 4·10 총선을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사람의 손을 거치는 수(手) 개표와 사전투표 용지 일련번호 바코드화를 도입키로 했다. 부정 의혹이 끊이지 않는 사전투표와 개표의 신뢰성을 높여 시비를 원천봉쇄하려는 조치인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또 다른 블랙홀인 사전투표 용지의 보안성 강화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를 비롯해  고위간부들의 자녀 특혜 채용과 북한 해킹 사태 등으로 드러난 선관위 병폐의 구조적 문제점을 전·현직 선관위 고위 관계자들의 전언을 통해 짚어본다.     ■  「 법률상 ‘현장 날인’ 10년째 안해 ‘공무원 반발’ 이유로 인쇄 날인 판사 겸직 위원장, 들러리 전락 ‘국회 대응’ 내세워 여의도 지원 」    선관위 “날인할 공무원 없다”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청사에 설치된 4·10 총선 종합상황실에 예비후보자 등록 현황이 표시돼있다. [뉴스1] 총선을 56일 앞둔 현재 최대 쟁점은 사전 투표용지 날인 문제다. 선거법은 사전투표 관리관이 자신의 도장을 찍어 정당성이 입증된 투표지를 교부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선관위는 “투표소가 혼잡해진다”는 이유로 사전투표가 도입된 2014년 이래 10년째 관인이 미리 인쇄된 투표지를 교부해왔다. “사전투표지 인쇄 날인은 선거권 침해가 아니다”는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법원 판례를 볼 때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국정원 점검 결과 해킹 세력이 선관위 관인 파일을 도용해 사전투표용지를 무단 인쇄·유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게 드러났다. 이에 따라 행정안전부는 법대로 관리관이 현장 날인한 투표용지를 배부케 하라고 선관위에 요구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도 8일 “본 투표와 달리 사전투표는 (현장 날인) 않겠다고 고집하면 선관위가 의심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관위는 “공무원들 반발이 심해 어렵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행안부 고위 관계자는 “총선에 필요한 공무원이 6만명인데 현장 날인시 1만명을 늘리고 예산을 110억원 증액하면 된다. 투입될 공무원은 수당을 올리고 휴가도 주기로 했다. 그런데도 선관위는 반대부터 한다. 행안부·법무부 장관이 공동 담화문을 내 압박을 이어갈 것”이라며 “한 위원장도 법무부 장관 시절부터 이 문제를 알아 목소리를 낸 것이며 앞으로도 (압박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선관위 관계자는 반박했다. “현장 날인 시 추가 투입될 공무원은 수만 명에 달한다. 행안부에 미리 그들의 명단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주지 않았다. 수당 올려준다고? 정당 참관인 수당이 9만원 인상된 만큼 공무원도 8만원은 올려줘야 한다고 국회에 요청했는데 겨우 3만원 올려줬다. 현장 날인은 불가능하다.”   전직 선관위 고위 관계자는 “사전투표가 워낙 논란이 많다 보니 자신의 도장을 찍었다가 무슨 책임을 지게 될지 몰라 공무원들이 기피하는 게 문제의 핵심”이라고 했다. 투개표 관리는 지자체 공무원들이 하는데, 법적 의무가 아니어서 행안부가 현장 날인 근무를 요청해도 거부하면 그만이고 선관위도 강제력이 없어 동원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인도처럼 선거업무를 공무원의 ‘의무’로 못 박고 거부시 처벌하도록 지자체법을 개정해야 한다”며 “사전투표는 투표 이후 상황을 선거에 반영할 수 없는 데다 부정 논란과 불복의 화약고가 됐으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게 선관위 자체 의견”이라고 했다.   선관위는 현재 중앙위원장은 대법관, 시·도 위원장은 지방법원장, 시·군·구 위원장은 지방법원 부장판사가 겸임한다. 비상근인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회의만 참석하고 업무는 선관위 공무원 수장인 사무총장이 장악하니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다. 노태악 중앙선관위원장도 “비상임의 한계를 너무 많이 느꼈다. 선관위원장은 상임이어야 한다”고 국회에서 말했다.   한 달에 30분 근무하는 선관위원장   5일 오후 과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청사에서 열린 총선 허위사실·비방 유관기관 대책회의 모습. 대검찰청과 경찰청, 방송통신위원회 등 13개 유관기관이 참석했다. [뉴스1] 시·군·구 선관위원장을 지낸 전직 부장판사의 고백이다.   “한 달에 한 번 하는 회의부터 형식적이었다. 선관위 공무원들은 회의 시각을 오후 5시 반에 잡더라. 현안 보고 30분 만에 회의는 끝난다. 한 달 내내 법원 업무만 한 내가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사정을 파악하겠나. 결재만 줄줄 해준다. 그러면 곧장 술을 곁들인 회식으로 이어진다. 회의 불참하고 회식만 한 선관위원들도 50만원 수당을 받더라. ‘이러면 되냐’고 했더니 ‘관행인데 뭘 따지시냐’고 하더라. 지방선거 앞두고 선관위 직원이 ‘수사 의뢰감’ 이라며 결재를 청한 건이 있었다. 범죄 수준이 못돼 거절했더니 ‘처벌된 유사 사례가 있다’며 반발해 ‘신중히 검토하라’는 선에서 매듭지었다. 그러자 직원은 결재된 것으로 치부해 윗선에 올려버리더라. 선거 당일도 가관이다. 내가 ‘중요한 날이니 선관위로 출근하겠다’고 하니까 선관위 공무원들은 ‘오셔봤자 하실 일 없다. 투표 마감 즈음인 오후 5시 반쯤 오시면 된다’고 막더라. 2년 전 대선 때 ‘소쿠리 투표’ 등 대혼란이 터진 사전투표일에 노정희 당시 중앙선관위원장이 출근하지 않아 욕을 먹었는데 실은 선관위 직원들이 ‘나오실 일 없다’고 막아 안 나왔을 뿐일 것이다. 내 경우는 위원장 인사말까지 직원들이 써주더라. 내용이 선관위 자화자찬 일색이라 수정하려 했더니 직원이 ‘(사무처) 국장님 아시면 큰일 난다’고 울먹이더라. 그래서 문안은 그대로 두고 현장에서 내용을 고쳐 말했다. 난 한마디로 ‘바지사장’이었다. 사무처가 선관위원장 상임화를 결사 반대하는 건 인사·재정 등 업무는 자신들이 장악하고, 문제가 터지면 책임은 위원장에 전가하기 딱 좋은 게 비상임 위원장제라서다.”   선관위 출신, 1급 상임위원 ‘독점’   신우용 제주 선관위 전 상임위원은 2021년 자녀에게 서울시 선관위 채용 정보를 미리 알려줬고, 자녀는 아버지의 동료에게 면접 본 끝에 채용된 것으로 선관위 감사 결과 드러났다. 신 전 위원은 기조실장 등 요직을 두루 지낸 ‘선관위맨’이었다. 이에서 보듯 제주를 비롯해 전국 17개 시도 선관위 상임위원(1급)은 선관위 출신들이 독점해왔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선관위법은 시도 상임위원을 ▶5년 이상 경력 법조인이나 ▶부교수 이상 학자 ▶2년 이상 근무한 3급 이상 공무원 가운데 지명토록 하고 있다. 그런데 선관위는 ‘7년 이상 선거·정당 사무에 종사한 4급 이상 공무원’을 시도 상임위원에 지명할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전 중앙선관위 위원은 “선관위 사무처는 이를 근거로 전국 시도 상임위원직에 내부 출신을 채워왔다. 외부 개방형 위촉을 원칙으로 한 선관위법 취지를 어긴 것”이라 지적했다. 한 전직 선관위원은 “사무처가 퇴직 간부들을 지방 선관위 수뇌부에 꽂아 17개 시도, 251개 구시군, 3505개 읍면동 선관위를 장악했으니 특혜채용 등 비리가 판치는데도 선관위원장은 들러리만 서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전직 선관위원은 “선관위 간부들이 선거 관리 등 본연의 업무 외에 정당들의 법령 자문이나 활동 지원에 역량의 상당 부분을 쏟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국회 대응’이란 이름 아래 행해지는 이런 활동은 선관위의 대 정치권 인사·예산 로비로  봐도 무리가 없다”며 “중앙선관위에 배치된 우수 인력 수백명이 이런 로비에 동원되며 일선 시군구 선관위의 역량은 하락해, 선거 때 부실 관리 논란 우려가 커진다”고 했다.   1963년 직원 348명으로 출범한 선관위는 61년 만에 직원 3000명에 예산 8700억원의 공룡조직이 됐다. 연간 4000건씩 사건을 처리하는 대법관이 비상임 수장을 맡아 지휘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최근 국민권익위원회는 선관위법을 개정해 각급 선관위에 상임 위원장 1인을 두는 조항을 마련할 것을 제언했다. 또 한 중앙선관위원은 대통령과 대법원장, 국회가 임명한 선관위원 1명씩 2년마다 돌아가며 상임 위원장을 맡는 방안을 제안했다.   전직 선관위원은 “헌법은 중앙선관위원 9명 중 ‘호선’을 통해 선관위원장을 정하게 했을 뿐인데 대법원장이 지명한 대법관이 자동적으로 위원장이 돼왔다. 말이 안 된다. 퇴직한 법관이나 교수 등 선관위 업무만 전념할 수 있는 인사로 상임위원장을 지명해야 한다”고 했다. 강찬호 논설위원

    2024.02.14 00:32

  • 건축왕에 최고형 선고했지만…전재산 날린 피해자, 얻은 게 없다 [최현철 논설위원이 간다]

     ━  전세 사기 광풍, 그 이후   최현철 논설위원 지난해 전국이 전세 사기로 몸살을 앓았다. 전세왕·건축왕·빌라왕·빌라의 신·빌라왕자….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한 듯 별의별 왕 이름이 붙은 사기 사건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피해자가 수만 명을 넘어가자 민심이 술렁였고, 개인 간 거래라며 방관하던 정부는 강력한 수사와 함께 대책 마련에 나섰다.   지난해 인천 건축왕 전세사기로 2700여 세대가 피해를 봤다. 이중 4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4월 피해 아파트 베란다에 전세사기 피해를 호소하는 현수막이 붙었다. 연합뉴스 인천 미추홀구는 지역 단위로 발생한 전세 사기 사건 중 서울 강서구와 함께 최대 규모의 피해를 본 곳으로 꼽힌다. 피해자 2700여명, 피해액은 2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4명이 지난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비극적인 열풍과 수사, 전세사기피해자지원특별법을 포함한 정부의 지원책까지 숨가쁘게 쏟아지며 한 해가 지나갔다. 하지만 다시 새해를 맞은 시점에도 피해자들의 사정은 그리 달라진 게 없었다. 인천 미추홀구를 중심으로 전세 사기 열풍 이후를 점검해봤다.    보증금 기약 없는데 유지·관리 이중고 미추홀구는 북쪽으로 국철 1호선이 관통하고, 수인분당선과 인천2호선이 각각 동북쪽과 남서쪽을 지난다. 몇몇 재개발 지역에서 대규모 아파트 신축 공사가 진행중이지만 대부분 빌라와 나홀로 아파트들로 채워진 곳이다. 교통은 편리한데 전셋값은 낮아 수도권에서 직장을 잡은 신혼부부나 독신 청년들이 대거 몰린 곳이다.   ■  「 인천 미추홀구, ‘건축왕’ 전세사기에 2700여 세대 피해 발생 경매 중단됐지만 건물 유지·보수 손 못대, 삶의 터전 붕괴중 우선매수·LH매입 등은 효과 못내…특별법 개정은 ‘논란중’ 남헌기 징역 15년,‘범단’ 인정돼도 더 안늘어… 환수도 미미 」  이곳에서 ‘건축왕’ 남헌기씨가 기업형 전세 사기를 벌였다. 빌라 몇 개를 모아 재건축 형식으로 1~3개 동의 아파트를 지은 뒤 공인중개사를 끼고 매매가보다 높은 가격에 전세를 놓았다. 초기 자금은 차입으로 해결했기에 건물은 모두 금융기관 선순위 담보로 제공됐다. 이 빚을 전세보증금으로 해결한 뒤 다시 돈을 빌려 비슷한 아파트를 짓는 식이다. 그러다 금리가 오르고 전셋값은 떨어지며 이자를 갚지 못할 형편에 이르자 건물들이 경매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세입자들은 대부분 후순위여서 보증금을 거의 받지 못한 상태다. 인천 미추홀구의 S아파트 외벽이 심한 비바람에 떨어져 나갔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관리비가 묶인채 수리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진 독자제공 도원역부터 제물포·도화·주안 ·간석역까지 1호선 라인을 따라 남북으로 늘어선 나홀로 아파트와 빌라들이 대부분 피해 주택이라고 했다. 설 명절을 한 주 앞둔 지난 2일 찾아간 주안역 부근 S아파트에는 필로티 구조의 1층 주차장 한켠에 콘크리트 잔해가 잔뜩 쌓여있었다. 심한 비바람에 외벽 마감재가 떨어져 내렸지만, 보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떨어진 외벽에 맞은 연통이 빠져 가스보일러를 틀 수 없게 된 세대도 있었다. 낙하물에 맞아 파손된 차량 보상도 바라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 아파트에 사는 강민석 씨는 “대부분의 세대에서 누수로 천장이 부서지거나 벽에 곰팡이가 끼고 물이 올라와 바닥재가 다 들뜨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지만 수리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전했다. 제물포역 인근 H아파트는 인도를 주차 차량이 온통 점령한 상태였다. 주차타워가 고장 나 사용할 수 없게 된 탓이다. 사기범 남씨는 하늘종합주택이란 관리회사도 차려 세입자로부터 꼬박꼬박 관리비를 받아갔다. 그런데 이 돈 일부를 횡령하고 남은 돈도 묶이면서 큰돈이 들어가는 유지·보수는 전면 중단된 상태다. 관리업체를 믿을 수 없게 된 주민 일부가 관리비 납부를 거부하자 전기료 연체를 이유로 관리업체가 배전반을 무단으로 뜯어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건물 유지·보수 문제는 전세 사기가 발생한 다른 도시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난해 11월 서울 강서구청이 전세 사기 피해자 355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한 결과 70.3%가 건물 유지보수 문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보증금 회수는 막막한데. 사건이 장기화하면서 피해자들의 삶의 터전이 서서히 붕괴하고 있었다.   숨통은 트였지만, 구멍 큰 특별법 미추홀은 피해 규모도 크지만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집단 대응을 하기 시작한 곳이다. 그 중심에 안상미(45) 씨가 있다. 그는 2020년 미추홀구 숭의동 H아파트에 보증금 7200만원의 전세로 입주했다. 한차례 계약을 갱신한 직후인 2022년 7월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통보를 받았다. 두 동짜리 아파트 100여 세대가 모두 같은 처지였다. 변호사비를 아끼기 위해 공동대응에 나섰는데 인천지역 피해자 대책위원회로 발전했고, 도시별 연합체인 전국 대책위도 책임지게 됐다. 대책위가 활동하던 지난해 6월 특별법이 제정됐다. 특별법은 ▶피해자 인정 ▶경(공)매 중단 ▶우선매수청구권 인정 ▶LH 매입 후 재임대 ▶금융지원 등이 골자다. 지난달 기준 전세 사기 피해지원위원회가 공식 인정한 피해 가구 수는 1만 944채에 이른다. 이들이 신청할 경우 법원은 일단 경매를 중단한다. 당장 거리로 나앉는 걱정은 일단 면했다.   특별법에 규정된 경매 유예는 최장 1년까지다. 그런데 올해 들어 다시 경매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지난달 말부터 인터넷 커뮤니티에  빨간 딱지로 도배된 지역별 경매현황 지도가 나돌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이 대표적인데, 미추홀 역시 위험 반경에 들었다. 인천 건축왕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 현관 입구에 경매 참여 불참을 요청하는 호소문이 붙어있다. 지난해 6월 전세사기피해지원특별법이 시행된 이후 피해자 요청이 있을 경우 법원은 경매를 중단하지만, 시한은 최대 1년이다. 최근 서울 강서구 화곡동을 비롯한 피해지역에 경매 물건이 쏟아지고 있고, 인천 미추홀구에서도 경매가 진행될지 여부에 피해자들이 불안해 하고 있다. 최현철 기자 우선매수청구권도 효과가 있을지 불투명하다. 법에 청구권을 부여한다고만 돼 있고 언제,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세부사항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일단 경매가 진행돼 누군가 낙찰을 받으면 그 가격에 청구권을 쓸지 결정해야 한다. 그나마 서너번 유찰이 돼 경매가가 내려가야 시세와의 차액으로 보증금을 어느 정도 벌충할 수 있다. 그 전에 낙찰되면 청구권을 써봐야 짐만 떠안는 셈이다. 최근엔 경매꾼들이 붙으면서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진다고 한다. 안 위원장은 “전세 사기 피해자의 집은 제발 입찰을 피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나마 경매 낙찰금을 낼 수 있는 피해자는 극히 일부다. 보증금이 전 재산인 대부분의 피해자는 LH의 매입 후 재임대에 기대를 걸었다. 주변 월세의 35~50% 수준에서 최장 20년까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홍보는 거창했지만 정작 지금까지 매입이 이뤄진 곳은 한 곳에 불과하다. LH가 매입하려면 서류상 하자는 없어야 하는데, 피해 아파트 특성상 도면과 실제 구조가 다르거나, 허가와 다른 용도로 쓰이는 곳이 많아 번번이 매입을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안 위원장은 “매입이 안 되면 다른 임대주택을 내준다고 하지만, 그곳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 끼어들기가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남은 희망은 특별법 개정이다. 지난해 말 야당 단독으로 상임위를 통과했는데, 정부와 여당이 반대해 법사위에 묶여 있다. 핵심 쟁점은  '선구제 후구상' 방안. 사인 간 거래에서 발생한 피해를 세금으로 메워줄 수 없다는 논리는 넘기 힘든 벽이다. 피해자들은 "건설사들의 PF 부실은 지원하면서 서민들의 전세 피해는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은 차별"이라고 주장하지만, 법이 개정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법정 최고형이 남긴 과제 미추홀을 둘러보고 며칠이 지난 7일, 인천지방법원 형사 법정 324호실에선 남 씨 일당에 대한 선고가 있었다. 30석 남짓한 법정은 피해자들로 가득 찼고, 좌석 뒤쪽이나 옆에서 서서 듣는 방청객도 많았다.   재판장인 형사1단독 오기두 부장판사는 형량 선고에 앞서 재판부에 접수된 피해자들의 사연을 읽었다. 사회에 나오자마자 파산한 스물 여섯살 청년, 365일 야간작업하며 받은 200만원 월급을 날린 가장, 딸 결혼식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자살을 시도한 아버지…구구절절한 사연이 법정을 채우는 동안 뒤쪽에선 울음과 한숨 소리가 퍼져나갔다.   2월 7일 인천지방법원에서 건축왕 전세사기범 남헌기씨에게 징역 15년이 선고된 뒤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유정 인턴기자 이날 오 부장판사는 남 씨에게 징역 15년, 나머지 일당들에게 4~13년을 선고했다. 사기죄는 최고 형량이 징역 10년이다. 범행이 여러 건이면 절반까지 가중할 수 있다. 대검찰청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1299명이 전세 사기 혐의로 기소됐고, 이 중 358명은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최근 주범들에게 속속 법정 최고형이 선고되고 있다. 하지만 단일 사건 피해자가 1000명이 넘고 대부분 피해 회복이 안된 점을 고려할 때 충분치 않다는 지적이 많다. 오 판사가 형량 선고 후 별도로 “현행법은 악질적인 사기 범죄를 예방하는데 부족하다”고 덧붙인 이유다. 남 씨는 다른 재판부에서 범죄단체구성죄에 대한 재판도 받고 있다. 인천지검 관계자는 “'범단' 혐의가 인정되더라도 더는 형량을 높일 수는 없지만, 범죄수익금 추적과 환수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1개 조직이 범단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환수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기사 취재에 이유정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   최현철 논설위원

    2024.02.13 00:42

  • 너무 높게 지은 아파트 위쪽 싹둑 자른다는데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  고도 제한 어겨 날벼락 아파트   강주안 논설위원 지난달 14일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에 있는 신축 양우내안애아파트에 간 임효순(61·여)씨는 단지에 차가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에 좌절했다. 아파트를 준공하게 됐다고 해서 받은 이사 날짜였다. 살고 있던 집엔 다른 사람이 오는데 이사 직전 못 들어간다는 통보를 받았다. 건설사가 아파트를 고도 제한보다 높게 짓는 바람에 관련 당국이 제동을 걸었다는 얘기였다. 들고나온 가구라도 새 아파트에 넣어두려 했으나 그조차 막혔다. 임씨는 인천 강화에 사는 지인의 집에서 방을 하나 얻어 지낸다. 다른 피해자들은 오피스텔이나 호텔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으나 임씨는 반려견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    ━  반려견 때문에 오피스텔 못가   오피스텔로 들어간 김명렬(74)씨는 밤에 도로 소음이 심하고 외풍 때문에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달 12일 이사하려고 살던 집까지 판 그는 이사 이틀 전 입주 청소를 하려다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월남전에 다녀온 국가유공자인 그는 “하루에 두 시간도 못 자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계획대로라면 지난달 입주를 시작했어야 할 8개 동 399가구의 이 아파트 단지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은 지난해 12월 22일. 한국공항공사가 ‘해당 건축물이 장애물 제한표면을 침투했다’고 통보하면서다. 공항공사 측은 7개 동이 고도 제한 높이(57.86m)를 초과했다고 밝혔다. 동에 따라 초과 높이는 63~69㎝였다.    ━  규정보다 63~69㎝ 높게 지어 입주 불가   ‘장애물 제한표면의 높이 이상의 건축물 등을 설치하거나 방치해선 안 된다’고 규정한 공항시설법 34조를 위반한 것이다. 항공기 안전 운항을 보장하기 위한 규정이다. 항공기 운항이 잦은 김포공항 인근에 지은 아파트가 고도 제한을 어겨 주민들 입주가 막힌 초유의 사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건설사 관계자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김포 지역에서 건물을 지으려면 고도 제한 준수는 필수”라고 말했다. 건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일반 지역에서 아파트를 지을 때 약간의 오차는 허용한다. 배관 작업 등을 하다 보면 처지는 부분이 생겨 아파트 높이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을 해주며 이 아파트가 초과한 69㎝는 통상 허용 범주 안에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항 인근에선 절대로 넘지 말아야 할 고도가 명확해 감리에서도 철저히 점검한다. 한 건설 관계자는 “시공사와 감리사가 일반적인 허용 오차만 생각하고 공항 주변의 고도 제한은 간과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 시공사는 양우건설이다. 회사 홈페이지에는 2023년 8월 1일 기준 시공능력평가액이 9104억원이라고 나와 있다. 2013년 12월 김포도시철도 3공구와 4공구를 수주하는 등 김포 지역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력을 소개한다.  ━  엘리베이터 옥탑 일부 철거 공사   지난달 26일 오전 11시 40분쯤 해당 아파트를 찾아가 봤다. 예정대로라면 이미 주민들이 입주해 차를 세워야 했을 지하 주차장에 금속 기둥을 촘촘히 세웠다. 공사 현장처럼 보인다. 101동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까지 올라갔다. 거기서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가보니 그곳도 공사장처럼 각종 구조물이 바닥에 널려 있다. 옥상에 있는 엘리베이터 옥탑 구조물과 난간 부분 구조물에 검은 선들이 그어져 있다. ‘컷팅선’이라는 글씨가 옆에 적혀 있다. 공항공사가 제한 표면을 침투했다고 지적한 건물 부위를 잘라내 고도제한을 맞추기 위한 표식으로 보인다.   고도제한을 침범한 부분을 해체하고 재시공해 다음 달 11일까지 사용 승인을 받겠다는 것이 양우건설 측의 설명이다. 옥상 난간 장식 구조물과 엘리베이터 상부 옥탑 구조물이 해당한다. 건물 윗부분을 잘라내는 방식이 안전에 문제가 없는지에 대해 양우건설 관계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판단돼 절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출입문 낮아져 화재 시 대피 등 우려   지난달 26일 곽종근 김포고촌역지역주택 조합장이 양우내안에아파트 옥상에서 절단면이 표시된 부분을 가리키고 있다. 강주안 기자 현장에서 보니 옥상 난간 부분의 경우 높이를 초과한 부분을 잘라내면 외형적으로 변화가 생기고 난간이 전반적으로 낮아져 원래 모습보다 불안하긴 해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진 않을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관련 시설인 건물 윗부분을 잘라내는 부분은 쉽지 않아 보인다. 70㎝ 정도를 제거해도 문제가 없을지도 의문이지만, 옥상으로 나가는 출입문의 높이가 상당히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화재 등 발생 시 주민들이 옥상으로 신속하게 대피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어서 잘라내는 작업 자체도 만만치 않다. 더욱이 현장을 가 본 101동은 7개 동 가운데 초과 높이가 가장 낮은 63㎝다. 69㎝를 초과한 104동의 경우 출입문이 더 낮아질 수 있다. 사진을 본 시공 전문가는 “계단실 자체가 기본적인 형태를 못 갖추다 보니 설계사의 공식적인 의견이 필요할 것 같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일 김포 고촌양우내안에 아파트 옥상에서 고도 제한을 초과한 건물 부분을 잘라내고 있다. [지역주택조합 제공] 주민들 사이에선 시공사와 감리사에게 책임을 묻더라도 일단 건물이 지어진 이상 그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에 대해 공항공사 관계자는 “안전과 관련돼있고 법에 규정된 사항이어서 임의로 양해할 사안이 아니다”고 말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주민들에 따르면 몇 달 전에 이미 아파트의 형태가 완성됐다. 이후 인테리어와 외벽 도색 작업 등이 오랫동안 진행됐다. 건물이 제한 표면을 침범해 사고 위험이 있는 상태로 상당 기간 방치된 셈이다. 앞으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항공기 안전 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  대입 농어촌 특별전형 차질 등 피해 사례 속출   아파트 착공을 앞둔 2019년 11월 공항공사는 사업계획에 대한 회신에서 건축물 설치와 관련해 ‘최고높이 도달 후 7일 이내’에 통보할 것을 요구했다. 만약 엘리베이터 옥탑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을 완성한 직후 공항공사와 협의했다면 즉시 시정에 착수할 수 있었다. 입주민이 곤경에 빠지거나 제한표면 침투로 항공기 안전이 위협받는 상태가 장기간 방치되는 상황을 피하는 게 가능했다. 임시 거처에서 지내는 입주민 고통이 커지는 가운데 양우건설은 본격적인 재시공에 들어갔다. 지하주차장에 금속 기둥을 설치한 이유에 대해선 “옥상 공사의 크레인 작업 때문에 안전을 위해 취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졸지에 떠돌이 신세가 된 입주민들은 입주대책위원회를 통해 피해 상황을 취합하고 있다. 집집마다 갖가지 피해가 속출한다. 아이 교육과 보육이 초비상이다. 맞벌이인 아들 부부를 위해 손자를 돌보던 조부모가 입주가 막혀 인천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면서 아이를 돌볼 수 없게 됐다. 이 때문에 아이 엄마가 직장을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  "입주민 피해 보상 무성의"   농어촌 특별전형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사례도 접수됐다. 이곳은 서울에 인접했지만, 농어촌 특별전형 지역에 해당한다. 이 전형에 지원하려면 학생이 중·고교 6년을 다녀야 한다. 당초 입주일이 1월이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3월 11일로 연기되면서 중학교 입학일에 입주를 못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해당 지역에서 중학교 입학을 못 하면 특별전형 지원에 차질이 생긴다. 일주일 차이로 전학하게 돼 두 학교의 교복을 사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곽종근 지역주택조합장은 “아무 잘못 없는 입주민 피해가 너무 크다”며 “시공사가 적극적으로 보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포시는 양우건설 등에 ‘입주민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대책을 마련하라’고 했으나 주민들 불만은 높아지고 있다. 보상 문제에 대해 김포시 관계자는 “시공사와 조합이 알아서 할 부분이고 저희가 관여를 못 한다”고 말했다.   서가공(32) 입주대책위원은 “입주를 못 한 분들에게 각종 비용 지급을 위해 양우건설에 예치금 1억원을 요청했으나 이조차 들어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  ━  "깎아내서 해결될 문제 아니야"   박문서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박문서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5일 “집을 깎아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나.   “도면과 다르게 시공이 되었다면, 시공사와 감리사의 책임이다"     높이 초과 부분을 잘라낸다는데.   “집이 장난감도 아니고 각각의 기능이 있는데 그걸 깎아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당 지자체, 공항공사를 비롯해 관련 기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조정 방법 및 보상 계획을 찾는 게 답이다.”   잘라내면 어떤 문제가 우려되나.   “건축 허가 때의 도면과 달라질 것이고, 최초설계 기능, 입면 구성이 달라질 수 있다. 피난 기준 등을 따지면 소방법에 저촉될 수도 있다.”   이런 문제가 왜 생기나.   “기본적으로 기술인 역량의 문제가 크다. 기술인에 대한 대우, 사회적 인식이 개선돼야 한다. 역설적으로 기술발전이 기술인 역량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기계가 도면을 읽어주고 구조 해석을 해주니 사람이 기계에 더 의존하게 된다.” 관련기사 “언제 어디서 칼부림 나도 이상할 것 없는 현실”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강주안의 시시각각] 읍소 대상이 된 제2부속실 설치 [강주안의 시시각각] 모비딕은 잠시 잊자 [강주안의 직격인터뷰] 일본보다 심각한 한국 은둔 청년…부모도 함께 치유해야 “제가요? 왜요?” 떠넘기기 선수 된 경찰·검찰·법원[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강주안 논설위원

    2024.02.06 00:28

  • [주정완 논설위원이 간다] “화장장이 기피시설? 마을 발전 위한 절호의 기회”

     ━  주민 공모로 장사시설 입지 선정한 양주시   주정완 논설위원 지난달 19일 오후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의 도락산 등산로 입구. 군부대의 기다란 담장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차를 달렸다. 잠시 후 산 중턱에 오르자 커다란 저수지가 보였다. 총저수량 1200t 규모로 주변 산업단지에 공업용수를 제공하는 광백 저수지다. 한겨울이라 물은 별로 없었지만 예전엔 제법 높은 곳까지 물이 찼던 흔적이 뚜렷했다.   저수지 근처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 올라갔다. 나무가 없이 억새로 뒤덮여 비교적 평평하고 너른 땅이 나타났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로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기자를 안내한 정지석 방성1리 이장은 “이곳은 양주시가 선정한 종합 장사시설의 건립 예정지”라고 소개했다. 그는 “근처 부대에서 군인들이 사격 훈련 등을 하던 곳인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주변에 민가가 전혀 없고 산으로 가려져 외부에선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억새 사이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북쪽으로는 도락산, 남쪽으로는 불곡산 능선이 훤히 보였다.     ■  「 경기 북부 화장장 부족 극심 예약 어렵고 사용료도 비싸   마을 발전기금 100억 놓고 경쟁 주민 72% 찬성 방성1리 최고점   “오랜 접경지 규제로 발전 막혀 장사시설 유치해 돌파구 마련” 」    장사시설 공모에 5개 마을 신청   지난달 19일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방성1리의 정지석 이장이 손을 들어 장사시설 예정지를 가리키고 있다. 양주시는 지난해 말 주민 공모로 사업부지를 결정했다. 주정완 기자 양주시 종합 장사시설(화장장 포함)은 2022년 7월 취임한 강수현 양주시장이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추진 중인 사업이다. 양주뿐 아니라 구리·남양주·의정부·동두천 등 경기 북동부 5개 시가 함께 하기로 손을 잡았다. 양주시는 지난해 12월 방성1리 산 75번지 일원을 사업부지로 확정했다. 민간 전문가와 주민 대표 등이 참여한 종합 장사시설 추진위원회에서 내린 결론이다. 주민 동의율 60% 이상인 후보지 세 곳이 경쟁을 벌인 결과 방성1리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전체 사업부지는 83만㎡로 축구장(7100㎡) 약 117개 면적이다.   양주시는 지난해 8월부터 10월까지 주민 공모 사업으로 장사시설 후보지 신청을 받았다. 모두 다섯 곳이 유치 신청서를 냈다. 정지석 이장도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정 이장은 “우리 마을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발전에서 소외된 지역이었다. 접경지역 군사 보호시설로 인해 각종 규제나 제약을 워낙 심하게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마을 발전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화장장도 전혀 기피시설이나 혐오시설이 아니다. 오히려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양주시는 장사시설을 유치하는 지역에 최대 400억원의 사업비 지원을 약속했다. 물론 이 돈을 한 마을에만 몰아주는 건 아니다. 방성1리에는 최대 100억원, 반경 2㎞ 이내 주변 지역에는 최대 150억원을 지원한다. 방성1리가 속한 백석읍에도 최대 150억원을 제공한다. 장사시설을 유치한 마을 주민에겐 추가 혜택도 준다. 장사시설 내부 식당·매점·카페 등 수익시설 운영권(20년)과 지역주민 우선 고용권이다. 화장 수수료 수입금의 10%를 10년간 제공한다는 조건도 있다. 방성1리 주민자치회의 김동한 사무국장은 “앞으로 법인을 만들어 지원금 사용처 결정과 회계 관리 등 모든 면에서 투명하고 공정하게 관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방성1리에선 전체 753세대 중 540세대(72%)가 장사시설 유치에 찬성했다. 주민 찬성률이 70%가 넘는 마을은 방성1리가 유일했다. 주민들 사이에선 장사시설 유치가 마을 발전의 돌파구가 될 것이란 기대감이 작용했다. 김 국장은 “양주는 동부권과 서부권의 격차가 크다. 옥정·회천 신도시 등이 있는 동부권은 개발 사업이 활발하지만 우리 마을을 포함한 서부권은 여전히 개발 규제가 심하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일부 규제가 풀렸다고 하지만 여전히 재산권 행사 등에서 어려움이 많다”고 덧붙였다. 김형래 주민자치회 총무도 “이대로 가면 10년, 20년이 지나도 발전 없이 소외될지 모른다는 절박함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군인 제외 실질 찬성률 80% 넘어”   유치에 찬성한다고 서명하지 않은 주민(28%)도 대부분 적극 반대는 아니었다고 정 이장은 전했다. 주변 부대에서 근무하며 방성1리에 주민등록을 한 군인이 108세대였다. 아무리 이장이라도 민간인이 군인을 상대로 서명을 받으러 돌아다닐 순 없었다고 한다. 정 이장은 “군인 세대는 아예 접촉이 허용되지 않았다. 군인을 제외한 실질적인 주민 찬성률은 80%가 넘는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지지부진하다 극적 반전   경기도는 전국 17개 시·도 중 인구(1360만 명)가 가장 많으면서 화장장 등 장사시설은 가장 부족한 지역이다. 경기도에서 화장으로 장례를 치르려면 다른 지역보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의미다. 보건복지부의 장사업무 통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으로 경기도는 화장장 공급이 수요보다 25%나 부족했다. 서울(15%)·부산(11%)·대구(5%)도 화장장이 부족하긴 했지만 경기도만큼 심하진 않았다.   특히 경기 북부는 고질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전국에서 62개 화장시설이 운영 중이다. 이 중 경기 남부에는 네 곳(수원·성남·용인·화성)이 있다. 하지만 경기 북부에는 고양시의 서울시립승화원(옛 벽제화장장) 한 곳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경기도가 아닌 서울시가 운영하는 시설이다. 서울·고양·파주 주민이 아니면 예약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린다. 요금도 서울·고양·파주는 12만원이지만 그 외 지역은 100만원으로 훨씬 비싸다.   양주시도 장사시설 입지 선정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2013년에는 주민 8187명이 서명한 경기 북동부 공동 장사시설 유치 청원서를 양주시의회에 냈다. 이들은 “혐오시설이란 이유로 반대가 예상되지만 현실을 고려하면 화장장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시의회는 이 청원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하지만 다른 주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면서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16년에는 민간 업체가 양주시 천보산 일원에 공동 장사시설을 건립하는 사업을 제안했지만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10년 넘게 지지부진하던 양주시의 장사시설 건립 사업은 결국 거액의 지원금을 내건 주민 공모 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고비를 넘었다. 난제 중의 난제로 꼽히는 입지 선정을 마을 간 유치 경쟁으로 해결한 사례다. 양주시는 앞으로 타당성 조사 용역과 지방재정 투자심사 등 사전 행정절차를 거쳐 2028년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행정절차와 공사 진행에 큰 차질이 없으면 2029년이나 2030년에 장사시설을 개장할 전망이다.   강 시장은 “단순한 장사시설을 넘어 양주시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정 이장은 “사업 진행 과정에서 장사시설 주변에 숲길 탐방로와 야영장·수변공원·산림욕장 등 다양한 관광·레저시설을 함께 조성하도록 건의할 생각”이라며 “기피시설이란 편견을 깨고 훌륭한 관광·편의시설로 활용하도록 힘을 모으겠다”고 말했다.     ■ 양평군도 주민 공모…최대 150억 지원 「 지방자치단체가 장사시설이나 쓰레기 소각장 등 기피시설을 주민 공모로 추진하는 사례가 잇따른다. 주민들은 유치 지원금을 받아 마을 발전에 쓸 수 있고, 지자체로선 주민 갈등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제주도에선 2022년 전국 최초로 주민 공모를 통해 광역 폐기물 소각장 입지를 결정한 일도 있었다.   경기도 양평군은 1일부터 3개월간 종합 장사시설 후보지 유치 신청을 받는다. 양평군이 제시한 장사시설 유치 지원금은 최대 150억원이다. 장사시설을 유치한 마을에는 60억원, 주변 1㎞ 이내 지역에는 60억원, 해당 마을이 속한 읍면에는 30억원을 지원한다. 유치를 원하는 마을은 주민 60% 이상 찬성을 받아 신청할 수 있다. 양평군은 현장심사 등을 거쳐 오는 9월 장사시설 입지를 선정할 예정이다.   양주시와 비교하면 양평군의 지원금 총액은 절반 수준이지만 장사시설의 예상 부지면적(약 30만㎡)은 양주시의 3분의 1 수준이다. 양평군은 지난달 말까지 읍면 단위로 주민설명회를 열었다. 이달부터는 희망하는 주민들의 신청을 받아 찾아가는 설명회를 열 계획이다.   경기도 과천시도 양평군과 손을 잡았다. 서울 서초·관악구와 맞닿은 과천시는 양평군과 상당히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다만 양쪽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면적이 좁은 도시인 과천시는 관내에 장사시설을 세울 만한 빈 땅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재정 자립도가 20%에 불과한 양평군으로선 과천시(재정 자립도 45%)와 함께하면 사업비 확보에 유리할 수 있다.   전진선 양평군수와 신계용 과천시장은 지난달 17일 공동 장사시설 건립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전 군수는 “갈등을 관리하고 자연 친화적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특별팀을 구성했다. 과천시와 함께 생애 주기 마지막을 위한 복지시설(장사시설) 확충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주정완 논설위원

    2024.02.01 00:36

  • "체제경쟁 패한 동독처럼 김정은 위기감에 '두 국가' 선언"[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김정은 의중 진단   장세정 논설위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연말·연초에 잇따라 던진 '폭탄 발언'은 핵실험 이상으로 파장이 메가톤급이다. 김일성·김정일 때와 달리 남북을 '적대적인 두 교전국'으로 규정하고, 민족과 통일을 부정한 발언에 담긴 의도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북한 주도의 통일론에 동조해온 주사파는 김정은의 기습 언행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침묵하더니 최근 잇따라 토론회를 열고 있다. 그런데 김정은의 민족과 통일 부정 발언에 대한 비판은 생략한 채 사후 합리화 논리 찾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김 위원장의 선언을 계기로) 2000년대 통일 운동은 종언을 고했다"라거나, "이제 북한을 '정상 국가 조선'으로 봤으면 좋겠다"는 궤변까지 쏟아내고 있다.   ■  「 1972년 방북 김일성 면담 경험 북한, 적화 통일 포기한 적 없어 세습체제의 붕괴위협 차단 의도 더 도전적 대남 전략·전술 펼듯  」   보수 성향의 전문가들은 비판적이다. 지난 22일 열린 세종특별정책포럼에서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주장해온 '1민족 1 국가 2 제도 2 정부'의 고려연방제에 의한 통일 실현 가능성이 없어지고 오히려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 가능성이 커지자 자기방어적 패배 선언을 했다"며 "주도권을 상실한 김정은이 대남 노선 전환을 선언해 주도권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조영기 한반도선진화재단 사무총장은 "북한은 결코 통일을 포기한 사실이 없다. 남북 체제 경쟁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자 화해 협력에 의한 평화통일을 포기하고 핵 무력에 의한 적화 흡수통일로 돌아섰다"고 비판했다.  김대중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강인덕(92)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석좌교수가 북한대학원대학교 도서관에서 김정은의 '두 국가' 발언 배경과 의도 등을 설명하고 있다. 평양이 고향인 그는 1950년 6.25전쟁 와중에 월남한 뒤 북한 연구에 평생 매진해왔다. 지금도 각종 북한 문헌을 두루 살핀다. 강정현 기자  김대중 정부에서 초대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강인덕(92)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석좌교수를 만났다. 좌우를 아우르는 남북문제 원로 전문가의 혜안을 듣기 위해서다. 평양이 고향인 그는 해병대 장교로 복무했고, 1961년 김종필 전 총리가 창설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북한국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16년간 북한 정보를 다뤘다. 특히 1972년 '7·4 공동성명' 발표 이후 그해 11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대표단원으로 방북해 김일성을 직접 만났다. '북한의 대남 전략과 통일전선'을 오래 연구했고, 지난 2022년에는 두 권짜리 『한 중앙정보 분석관의 삶』을 출간했다.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 연설에 담긴 김정은의 대내외 메시지는.  "노동신문에 게재된 김정은의 발언을 보면서 '남조선 영토를 평정하겠다'는 구절에 주목했다. 이 말은 김일성이 1950년 6·25전쟁을 일으키면서 제시했던 '국토 완정(完整)'과 같은 주장이다.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과 동일한 수준의 영도자가 된 듯 자신을 과시했다. 대내적으로 공포정치로 독재 기반을 구축했고, 대외적으로는 핵·미사일 개발로 한·미·일 등 적대 세력과 대결할 수 있는 현대적 군사력을 보유하게 됐다. 중국과 러시아까지 동의한 전례 없는 대북 제재에도 지난 10여년의 집권 기간에 자력갱생으로 경제 생산과 건설을 계속해 아버지 김정일 시대처럼 수많은 인민이 굶어 죽는 '고난의 행군'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아의 군사 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유리한 국내외 정세를 형성했다. 정치·외교·경제·군사적 치적을 바탕으로 향후 더욱 도전적인 대남 정책과 전략·전술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5월 16일 군사정찰위성 1호기를 시찰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손에 담배가 들려 있다. 김 위원장의 얼굴이 스트레스에 찌든듯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옆에 딸 김주애가 앉아 있다.[연합뉴스]   남북관계 개선 가능성 없다고 본 듯  -하나의 민족을 부정하고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라 규정했다.  "한마디로 북한의 체제 수호에 엄청난 위협이 도래했다고 김정은이 판단한 것이다. 북한식 사회주의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와의 체제 경쟁에서 패배한 것을 스스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김일성은 '언어·사회·문화가 동일한 인간 집단'이란 마르크스주의의 민족 개념에 혈통을 추가했다. 북한 체제가 우위를 유지했다면 굳이 남북 관계를 바꿀 이유가 없다. 더 강력하게 남북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고, 하나의 민족을 주장하며 사회주의 혁명을 선동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다. 해외에 파견된 외교관과 수십만의 외화벌이 일꾼 등을 통해 남한 정보가 북한에 물밀 듯이 유입되고 있다. 휴대전화가 500만대를 넘었고 컴퓨터 사용자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북한의 'MZ 세대'는 해외 정보와 남한 문화에 쉽게 접근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북한의 세습 독재 체제를 밑으로부터 붕괴시키는 강력한 위협 요소다. 이를 막기 위해 북한은 '반동 사상·문화 배격법'과 '평양 문화어 보호법' 같은 기상천외한 악법을 도입했다. 강력한 대북 정책을 추진하는 윤석열 정부가 등장하자 남북 관계 개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적대 세력의 침략 위협을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1974년 당시 에리히 호네커 동독 통일사회당 서기장이 '두 개의 독일'을 선언했던 것처럼 김정은이 '두 국가'(Two Koreas)를 선언한 것이다."    -적화 통일을 외쳤던 김일성·김정일의 유훈을 폐기한 것인가.  "김정은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통일 유훈을 폐기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뜻, 즉 통일 유훈의 정수를 정확히 이해하고 계승·수호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김정은은 내심 핵·미사일 개발로 무력 통일 가능성이 커졌다고 볼 것이다. 김일성도 김정일도 비군사적 방법으로 통일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겉으로는 연방제 통일과 평화 통일을 떠들었지만, 속으로는 남조선 혁명을 통한 적화 통일이자 주체사상에 의한 통일을 노려왔다. 79년간의 3대 세습 기간에 무력 통일 노선엔 변화가 없었는데, 마치 북한이 달라진 것처럼 여긴 것은 우리다." 2018년 9월 20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백두산 천지에 올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전날 두 사람은 '9.19공동선언'을 발표했으나 한반도 평화는 아직 요원하다.[평양사진공동취재단]   대남공작과 교란작전은 계속 자행  -조평통 등 대남 대화·교류 기구를 전격 폐지했다.  "북한이 남북 관계를 적대 관계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평정할 대상이라고 선언한 상황이니 대화와 교류 협력을 위해 조직했던 조평통·민경협 등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앞으로 대남 사업은 '국가 대 국가'라는 논리에 따라 군사력 담당 부서인 인민군 총참모부 정찰총국, 외교를 맡은 외무성이 담당하면 된다고 북한은 보고 있다. '제1의 적국'으로 규정한 한국을 외교와 군사 위협으로 대하면 된다고 여기니 앞으로도 대남 공작은 계속할 것이다. 대남 기구들이 해체됐으니 대남 공작과 교란 작전을 안 할 거라는 논리는 지극히 안이하다. 외무성 조국통일국과 총참모부 정찰총국, 그리고 각 군단 산하 경보병 부대가 대남 공작 및 교란 작전을 담당하면서 SNS 여론 조작, 심리전, 간첩 침투 및 지하당 조직 등을 끊임없이 자행할 것이다."  -이제 남북은 사실상 영구 분단체제로 가나.  "1972년 7·4 공동성명 발표 당시 중앙정보부 북한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해 11월 북한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대표단원으로 방북한 뒤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 "남북 대화에 응한 북한에 전술적 변화는 있어도 전략적 변화는 없다"고 보고했는데 박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은 핵 개발에 반대하는 국제사회의 압력을 피하려는 북한의 전술적 방편이었다. 남북이 동의한 모든 선언과 합의서는 북한이 지키려 하지 않는 한 이미 그때부터 무효인 문서일 뿐이다. 향후 남북한이 영구 분단 체제로 가느냐 여부는 선언이나 합의문 폐기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남북 쌍방이 분단 종식을 위한 대책을 실천하는가에 달렸다. 역학 관계의 변화가 영구 분단이냐, 분단 종식이냐를 결정하는 관건이다."  1972년 11월 3일 당시 강인덕 중앙정보부 북한국장이 남북조절위원회 대표단원 자격으로 방북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가운데)의 소개로 김일성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강인덕 석좌교수 소장]   의연하게 평화적 통일 지향해야  -북한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 할까.  "북한이 대남 인식을 바꿨다고 해서 우리도 똑같이 북한을 '우리의 적대 국가'로 재삼 규정할 필요는 없다. 윤석열 정부 들어 국방부가 발간한 '국방백서'에 북한 정권과 북한군을 적으로 규정했지만, 북한 동포는 앞으로도 적이 아니라 피를 나눈 같은 민족이란 인식을 가져야 한다. 헌법 3조(영토 조항)와 4조(통일 조항)에 따라 지금까지 유지해온 남북 관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말고 의연하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 김정은이 전쟁으로 통일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 평화는 전쟁에 대비하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핵 사용은 김정은 정권의 종말'이란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군사적 대응 태세를 더 강화해야 한다. "  -정부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국내외 적대 세력이 가하는 안보 위협은 물론이고 동맹국과 우호 협력국이 가하는 국익 훼손 위협 등에 대해 전방위적 대응 태세를 수립하고 실행해야 한다. 국정원은 가장 효과적인 대북정보 심리전, 정치작전 수행기구다. 북한의 체제 변화가 김정은의 핵 위협을 제거하는 유효한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국정원 대북 심리전 부서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 통일부는 앞으로도 남북 관계를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관점에서 정세 변화에 따른 남북 대화 재개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조직과 인원 감축보다는 정세 변화에 맞게 임무를 조정·재배치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통일부가 국민의 통일 의식을 고취해야 북한의 '두 국가' 주장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92세인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요즘도 서울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 도서관에 매주 나가 북한이 발간한 1차 자료를 직접 챙긴다. 그는 2022년 두권 짜리『한 중앙정보 분석관의 삶』을 출간했다. 장세정 기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2024.01.30 00:49

  • "AI가 재판 지연을 구원하리니…" [최현철 논설위원이 간다]

     ━  정년 앞둔 老법관의 정책제언 따라잡기   최현철 논설위원  현재 사법부의 최대 과제는 재판지연 해소다. 사건 자체가 늘고 복잡해진 점과 고법부장 승진제 폐지, 판사들의 워라벨 중시 풍조 등 몇몇 원인도 꼽히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천대엽 신임 법원행정처장이 지난 15일 취임 기자회견에서 독특한 해법을 제시했다. 법원에 AI 시스템을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 문제는 없을까.     천 처장에 앞서 지난해 연말 서울고등법원 강민구 부장판사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정년 법관의 정책제언’을 발표했다. 그중 하나가 AI 판결 이유 작성 도우미 도입이다. 대법원이 이를 전격 수용한 셈이어서 눈길을 끈다. 강 판사는 이달 말 36년의 판사 생활을 마친다. 하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저술과 유튜브, 강연 활동을 하며 AI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다. 노 법관의 공직생활 끝자락을 동행해봤다.       ■  「 천대엽 행정처장, 재판지연 해결 위해 "AI 도우미 도입" 발표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정책제언' 법원이 전격 수용 "법관 당 연구관 3~5명 지원 효과…판결문 공개가 전제조건" 이달 말 퇴임 … "디지털 디바이스 해결 위해 노력할 계획" 」      136만 뷰 찍었던 무대에서 고별 강연 1월18일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부산지방법원에서 'AI 시대의 생존 자세'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강 부장판사는 이달 말 정년퇴임한다. 이날 강연이 공직자로서의 마지막 외부 일정이었다. 그는 스크린에 자신의 스마트폰을 미러링한 노트북 화면을 띄운 채 AI를 활용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다양한 시연을 했다. 사진 부산지방법원 지난 18일 부산엔 종일 겨울비가 내렸다. 강 판사는 오후 3시부터 부산지법 강당에서 ‘AI 시대의 생존 자세’를 주제로 강연했다. 공직자로서 마지막 외부 일정이다.    사실 이곳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는 2015년부터 2년간 부산지방법원장을 역임했다. 2017년 1월, 임기를 마치고 떠나며 ‘혁신의 길목에 선 우리의 자세’라는 주제로 고별강연을 했다. 이 영상을 갈무리해 유튜브에 올린 게 대박이 났다. 2주 만에 조회 수가 100만을 넘었고 지금까지 총 136만 뷰를 기록했다. 이전부터 법원 내 IT 전문가로 통하던 그는 이 동영상을 계기로 법원 외부에서도 강연 요청이 쇄도하는 파워 인플루언서가 됐다. 사실상 전국구 스타로 처음 데뷔한 곳을 고별 무대로 잡은 셈이다.   강연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미러링 한 노트북 화면을 스크린에 띄우며 시작했다. 챗 GPT와 구글 바드 어플을 다운받고, MS 빙의 코파일럿과 네이버 클로바X 첫 화면을 바탕화면으로 끌어오는 과정을 시연하자 청중들도 부지런히 따라했다. 현존하는 ‘AI 4대장’을 장착한 것만으로도 뿌듯해하는 표정이었다.   이어 강 판사가 AI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게 하고, 법관들이 지녀야 할 자세를 묻고, 학교폭력 피해자 고소장을 쓰게 했다. 그는 이 과정을 “AI를 고문한다”고 했지만, AI는 무던하고 성실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 신속성과 정확성에 ‘와~’하는 감탄과 박수가 어우러지며 예정했던 2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AI가 불러올 재판의 미래 부산 강연 하루 전, 강 판사의 사무실을 찾았다. 서울고법 15층 사무실에 들어서자 ㄱ자로 놓인 책상을 둘러싸듯 놓인 모니터 4개와 노트북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한쪽 구석엔 외장 하드 4개를 꽂을 수 있는 인클로저도 보였다. 현재 꽂힌 것만 40테라바이트 용량이었다.   강민구 부장판사는 지난해 말 '정년 법관의 정책제언'을 통해 'AI 판결 이유 작성 도우미 도입'을 주장했다. 지난 15일 천대엽 신임 법원행정처장이 이를 수용해 재판 지연 문제 해소를 위해 AI 활용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히며 화제를 모았다. 강 판사는 지난 17일 서울고등법원 15층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통해 AI를 활용한 재판지연 해소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우상조 기자   ‘정년 법관의 정책제언’은 그가 평소 ‘디지털 상록수’와 ‘송백일기’라는 개인 블로그를 통해 꾸준히 해오던 주장을 지난해 말 12개의 시리즈로 정리한 것이다. 이중 법원 시스템에 관한 부분은 크게 ▶판결문 작성 AI 도입 ▶디스커버리 제도·중재원 도입 ▶판결문 전면 공개 ▶지방 순환 근무 폐지를 포함한 인사제도 개편 등 4가지. 가장 관심이 가는 AI 도입 문제부터 물었다.   -AI가 법관을 어떻게 지원한다는 건가. “결론을 AI가 내리는 것은 아니고, 판결 이유 작성을 보조하는 것이다. 주장을 요약하고 판례·법령·법리 중 가장 알맞은 것을 순식간에 찾아주면, 판사가 마치 레고 블록으로 자동차 조립하듯 판결문에 끼워 넣을 수 있다.”   -재판지연 해소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법관마다 3~5명의 재판 연구원이 24시간 대기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것이다. 지금 판사 한 명이 주 3건의 판결문을 쓴다면 AI의 도움을 받으면 5~8건을 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변호사인 마이클 코언이 AI가 제시한 허위 판례를 법원에 냈다가 들통나는 등 법률 AI의 부작용도 나오고 있다.   “초기 AI들은 학습된 정보가 없을 경우 전후 맥락을 분석해 가장 근사치의 답을 추론해 제시하도록 설계됐다. 처음부터 몰라도 아는 것처럼 '뻥'을 치라고 주문한 것이다. 여기서 환각, 즉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오류 가능성을 알고 사용자가 걸러내야 하는데, 코언은 이를 몰랐던 것 같다.”   -AI가 내놓는 답변의 진위를 사용자가 일일이 판단해야 한다면 결국 업무부담은 그대로일 것 같다. “이런 오류는 AI 기술 발전과 피드백 등에 의해 걸러지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특히 ‘렉시스+AI’나 ‘웨스트로프리시전’ 같은 법조 전문 버티컬 AI는 범용 AI와 달리 법률 부문의 데이터만 깊게 학습하기 때문에 오류 가능성이 거의 없다.”   -드루킹이나 댓글조작 사건처럼 외부에서 작정하고 왜곡된 정보를 학습시키면 오류 가능성이 커지지 않을까. “그래서 법원에서 쓸 AI는 폐쇄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일단 개발되고 나면 외부 데이터 입력을 차단하고 법원 내부의 광범위하지만 검증된 자료로만 학습시킨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잠자는 백설공주는 누가 깨울까 강 판사는 기술적 설명을 하면서 몇 차례 시연을 해 보였다. 구글 바드는 판례와 법리를 찾아달라는 명령에 답을 내는 데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소액 사건 판결문은 지금의 범용 AI도 순식간에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실제 5000만원 짜리 대여금 채권을 요청하는 사건 정황을 제시하자 AI는 정확하게 양식에 맞춘 판결문을 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후 만찬 자리에서도 이걸 보여줬다. 조 대법원장은 “심의관 10명보다 낫다”고 평했다고 한다. 천 행정처장이 AI 도우미 도입을 발표한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깔렸다.   그는 전제 조건으로 판결문 완전 공개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법관들이 법률과 판례, 실무 논문들을 기초로 작성한 엄청난 양의 판결문이 ‘AI 학습의 보고’라는 것이다. 또 처음엔 법원이 직접 개발하지만, 결국 민간이 경쟁해 좋은 AI를 만들고 법원은 그걸 수용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했다. 이게 가능하려면 민간이 판결문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판결문 공개를 “잠자는 백설 공주를 깨우는 것”에 비유했다.     법원은 지금도 판결문을 공개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지만, 실제 공개되는 판결문은 극히 일부에 그친다. 게다가 엄격한 익명처리 때문에 판결문이 아닌 암호문 같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이를 개선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했다고 한다. 법률 개정안까지 다 준비했지만 지난 6년간 묻혀버렸다. 결국 누가 백설 공주를 깨울 수 있을지가 관건인 셈이다.   호기심 많은 ‘정통 법관’의 업보 강 판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IT 전문가지만, 그렇게만 규정되는 현실에 불만을 표시했다. 일반 사건을 남들보다 더 많이 처리한 '정통법관'이라고 몇 차례나 강조했다. 법원 판결문 검색 시스템을 열어 자신이 판결한 사건 수를 보여주기도 했다. 지난 36년 동안 그의 이름이 들어간 판결문(신청 사건 제외)은 총 1만201건. 연수나 법원장으로 재판을 직접 하지 않은 시간을 제외하면 연간 350건 이상 판결한 셈이다.   그는 전임 재판부가 2~3년, 혹은 5년 넘게 끌어온 장기미제 사건을 거침없이 처리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 구로공단 농민 토지수용 손실보상금 사건, 4대강 사업 허가 취소 사건, 혈우병 관련 에이즈 감염 사건, 기저귀 특허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판사가 평생 1만건 넘는 판결을 하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보통 판사생활 30년을 넘기면 고등법원장이 되고, 이후엔 원로법관으로 나가 판결할 기회 자체가 줄기 때문이다.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그동안 출간한 전자책. 모두 12권에 이르며 디지털 상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 시절 강 판사는 사법 농단 사건을 검찰에 넘기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고등법원장 임명에서 배제됐다. 당시 사표 쓸 결심도 했는데 아내의 만류로 접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다시 재판을 하면서 1만 건을 넘겼다. 또 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등진 윤성근 부장판사를 기리는 책 권과 자신의 법관 생활을 총정리한 9권 등 총 12권의 전자책을 출간했다. 전체 분량은 9455쪽에 이른다. 그는 "디지털 정약용이 된 심정으로 이를 악물고 완성했다"고 했다.   그는 퇴임 후 변호사 활동과 함께 연구소를 하나 만들 생각이다.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디지털 디바이드(양극화) 해소에 힘을 쏟겠다는 것이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IT 얘기다. “IT 전문법관이라는 별칭은 나 스스로 IT에 관심이 많고, 그걸 감추지 않은 업보”라며 웃는 모습이 허허로웠다. 최현철 논설위원

    2024.01.23 00:36

  •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100만원보다 몽당연필 간절했던 DJ, 감옥은 대학이었다

     ━  김대중 탄생 100주년 도서전과 다큐 ‘길위에 김대중’   서경호 논설위원 지난 6일은 김대중(1924~2009) 전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지난 주말 전후에 전국적으로 열렸다. 5일 서울 동교동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2층에서 전시 중인 김대중도서전을 찾았다. DJ의 애독서와 감옥에서 읽은 책, 친필자료 등이 전시됐다. 동교동은 DJ가 1963년부터 95년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할 때까지 32년 넘게 지낸 곳이다. 2003년 대통령에서 퇴임 후 서거할 때까지도 이곳에서 살았다. 동교동 집 옆에 가택연금 중이던 DJ를 감시하던 기관원들이 드나들던 건물 자리가 지금의 김대중도서관이다.   감시 건물이 김대중도서관 변신   전시 안내글은 이렇게 적었다. “김대중은 수감 생활의 고통을 독서를 통해서 이겨내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옥중에서 1000여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헨리 키신저의 『White House Years』, 박경리의 소설 『토지』 등 감옥에서 그가 읽은 책과 주요 목록을 볼 수 있었다.     ■  「 투옥 6년간 1000여권 독서…“책 읽으러 다시 감옥행 충동도” 영화 ‘서울의 봄’ 전후 역사 다룬 다큐 ‘길위에 김대중’ 곧 개봉 “정치가는 성직자도 도덕운동가도 아니다, 사회 변화 시켜야” 」    김대중도서관 1층 상설 전시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6일 10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인용한 DJ 어록이 보인다. 서경호 기자 DJ는 6년의 수감 생활을 대학생활에 비유할 정도로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기록을 남길 정도였다. “일이 바빠 책을 볼 시간이 없을 때는 정말이지 다시 감옥에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기도 했다. 감옥에 다시 가고 싶다니, 누구도 잘 믿기지 않겠지만, 그곳에서 체험한 보석같이 찬란한 인생의 진리를 생각하면 감옥 가는 것 정도의 역경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1993년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유신 치하에서 3·1 민주 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됐다 2년10개월여 만에 출옥한 1978년 12월 말엔 감옥 안에서 느꼈던 ‘연필 한 자루’의 간절함을 이렇게 토로했다. “연필 차입을 수차 당부했으나 당국은 거부했다. 성경에 있는 사도 바울의 편지도 옥중에서 쓴 것이며, 인도의 간디도 옥중에서 집필했다. 새끼손가락만 한 연필조각과 100만원 중의 어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연필을 택했을 것이다. 쓰고 싶은 것을 쓰지 못하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 없다.”   “전체·부분 같이 보고 경중 판단을”   서울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 전경. 서경호 기자 감옥에서 쓴 DJ의 편지는 훗날 『옥중서신』으로 출간됐다. 전시된 인용문에는 세상을 읽는 DJ의 세계관이 담겨있다. “우리는 삶의 자세를 갖추는 데 언제나 사물을 근원적인 것과 표면적인 것을 합쳐서 파악하고 부분적인 것과 전체적인 면을 아울러 보아야 합니다. 전체와 부분을 같이 보고 경중, 완급을 종합 판단해야 합니다.”   그의 유명한 어록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설명하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우리가 어느 분야에서나 성공하려면 서생과 같이 양발을 원칙 위에 확고하게 딛고, 상인과 같이 양손은 자유자재로 방법을 구사하는 두 가지의 조화 있는 발전을 기해야 합니다.”(1981년 6월 23일 서신)   도서관 1층 상설 전시관에선 1980년 신군부에 연행돼 사형선고를 받고 아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볼 수 있었다. “진정으로 관대하고 강한 사람만이 용서와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항상 인내하고 우리가 우리의 적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자. 그래서 사랑하는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하자.”   서거 전 마지막 독서는 『조선왕조실록』   도서관 5층의 DJ 집무실. 서경호 기자 전시 기간에 건물 5층의 집무실이 특별 개방됐다. 퇴임 후 쓰던 곳이다. 집무실 책상 옆에 그의 지팡이가 있었다. 안내를 맡은 김대중평화센터 직원은 “대통령 책상 위에 마지막까지 놓여있던 책은 『조선왕조실록』이었다”고 했다. 2층 전시 공간에선 DJ의 마지막 독서가 에이미 추아의 『제국의 미래』와 『조선왕조실록』(세종·문종실록)이었다고 보여줬다. 김대중도서전과 집무실 개방은 12일까지 이어진다.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 포스터. 10일 개봉 예정인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도 빼놓을 수 없는 100주년 행사다. ‘노회찬 6411’을 찍은 민환기 감독 영화다. 개봉을 앞두고 진행된 시사회에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해 화제가 됐다. 정치인 DJ의 성장사를 실감 나게 볼 수 있다. DJ의 청주교도소 영상은 이 영화에서 처음 공개된다. 미국 망명을 끝내고 1985년 2·12 총선 나흘 전에 귀국하는 장면에선 DJ의 주도면밀함을 느낄 수 있다. 귀국 길에 암살당한 ‘제2의 아키노 사태’를 우려하는 국제 여론을 등에 업고 미국 정치인 등 고위 인사 20여 명을 ‘인간 방패’처럼 대동하고 귀국했다. 영화는 DJ가 1987년 대선 후보로 나서는 장면에서 다음 편을 예고하며 끝난다. 다큐 앞부분은 영화 ‘서울의 봄’을 분노하며 봤던 젊은이들에겐 프리퀄(Prequel)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반기문 “지도자는 세상을 넓게 봐야”   1964년 동료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를 막기 위해 DJ는 5시간19분 간 원고 없이 필리버스터를 했다. 가장 긴 한국의 국회 연설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서경호 기자 6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100주년 기념식도 지켜봤다. “정치지도자는 세상을 넓게 보고 10년, 20년 뒤 미래를 개척하는 정치를 하고, 편견과 차별을 관용과 용서로 녹여내는 것이 김대중 정신”이라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축사와 “야당일 때는 정부·여당과 초당적 협력을 하고, 집권했을 때는 국회와 야당을 존중했던 DJ는 진정한 의회주의자”라며 지금 우리 정치가 실패하고 있는 대화와 타협을 촉구한 김진표 국회의장의 축사가 기억에 남는다. 행사 마지막에 AI 기술로 구현한 DJ의 당부도 인상적이었다. “과거에 매여 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행복한 미래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DJ는 한일회담에 무조건 반대하지 않았다. 조건부 지지를 표명한 그는 ‘왕사꾸라’라는 비난을 받았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정치가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건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김종필과 연합하고 박정희를 용서하고 한일 관계개선에 나선 DJ가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견 배신 같고 정치적 술수로 이해되고 적에게 양보하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결과로서 우리 사회를 변화시켰다. 정치가는 성직자도, 도덕 운동가도 아니다. 마땅히 DJ처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 DJ는 현실적이고 실체적 의제에 집중…요즘 정치인이 더 일방적이고 독단적 「 ━ 정치학자 박상훈이 보는 DJ  박상훈 다큐멘터리 ‘길위에 김대중’에는 정치학자 박상훈(국회 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사진)의 인터뷰가 나온다. DJ가 돌풍을 일으켰던 1971년 대선에 대해 박상훈은 “DJ가 민주주의 원리에 기초를 둔 공약과 주장을 내놓았기에 권위주의 체제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신뢰를 줬다”고 평가했다. 그의 얘기를 더 들어봤다.   71년 대선에서 DJ는 94만여 표 차로 졌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당시 집권세력은 DJ를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몰아붙였지만 고전했다. DJ가 경제와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정책 대안을 말했기 때문이다.”   DJ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나. “정치가 김대중의 장점은 어떤 상황에서든 독단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반체제 운동가라기보다는 정치가로 살았다. 늘 체제 내에서 변화를 도모했고, 상대를 존중했기 때문에 자신의 옳음만 강변하지 않고 공존의 길을 찾았다. 그렇기에 군사정권에 가장 큰 위협이 됐다. 낭만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이었고, 실체적 의제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 때도 김대중은 오늘의 정치가들처럼 독단적 반대를 소리 높여 외치지 않았다, 그런데, 민주주의하에서 오늘의 정치인들이 군사독재 때보다 더 일방적이고 독단적이다. 그러니 실체적 변화는 이끌지 못하고 시민사회를 분열과 적대로 고통받게 한다. 정치가는 정치가다워야 한다는 것, 지사적 외침만 앞세우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는 것, 정치는 사회를 통합하고 실체적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운동가의 역할도 살고 지식인의 존재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배웠으면 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는 듯한 정치는 공동체를 파괴한다.”   DJ를 의회주의자라고 많이들 평가한다. 의회주의자는 어떻게 정의하나. “의회는 ‘말하다’라는 어원을 갖는다. 평화적으로 말다툼하는 곳이다. 그러려면 얼굴 붉히지 않고 반대 토론하고 이견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도 야당을 인정하고 대화할 때만 의회주의자가 될 수 있다. 번갈아 집권하게 될 야당도 집권당과 대통령에 야유를 보내는 대신 존중해야 다음 번에 의회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며 정부를 이끌 수 있다.”   다큐 ‘길위에 김대중’에서 광주의 비극이 DJ를 단단한 내면의 정치인으로 성장시켰다고 평가했던데. “정치가의 소명감과 책임감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가 대표해야 하는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애환과 고통을 공유할 수 있을 때 정치가는 성장한다. 그런데 요즘 정치가의 말과 행동에는 자신의 야심과 영광만 있을 뿐 사회적 내용이 없다. 민중의 대표로서 호민관의 느낌을 주는 정치가는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 정치를 지켜보기 괴롭다.” 」 서경호 논설위원

    2024.01.09 00:27

  • “언제 어디서 칼부림 나도 이상할 것 없는 현실”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  〈진주 안인득 사건 재판서 드러난 위험 환자 관리 실태〉     ■  「 학계·법조계 지원한 피해 가족 소송서 “국가 4억원 배상” 판결 “윗집서 곰팡이 던진다”며 잇단 난동에도 경찰 입원 추진 안해 다른 피해자도 거액 배상 예상되나 후유증 심각해 소송도 못내 정신과 전문의 “위험한 정신질환자 범죄 사전예방 불가능 상황” 」  강주안 논설위원 이제 남은 시간은 3개월뿐이다. 2019년 4월 17일 경남 진주에서 조현병을 앓는 안인득 씨가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는 사람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5명을 살해하고 17명을 상해한 참극. 사건의 피해자가 국가에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한(5년)이 거의 다 지나갔다.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24부(박사랑 재판장)는 피해를 본 금모 씨 가족에게 국가가 약 4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주민들의 잇따른 신고로 예방이 가능한 사고였는데도 경찰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소송을 대리한 '법과 치유' 오지원 변호사는 “자·타해 위험성이 있는 정신질환자에 대해 경찰이 신고자의 호소를 가볍게 취급하면서 관계 법령에 따른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판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  3개월 뒤 소송 기한 끝나   진주 안인득씨 사건을 취재 중인 독립영화감독 박보현씨가 지난달 22일 오후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오른쪽 사진). 왼쪽 사진은 2019년 사고 직후의 모습. 강주안 기자, [연합뉴스] 이번 판결은 안 씨로 인해 가족을 잃었거나 다친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머지 피해자들도 소송을 제기하면 거액의 배상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국가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5년이어서 석 달여 뒤면 배상 청구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피해자와 가족들은 소송할 엄두도 못 낸다고 한다. 사고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탓이다. 이번에 승소 판결을 받은 금 모 씨는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빗물이 사고 당시 흥건했던 피로 느껴져 외출을 못 한다”고 했다.   임대 아파트 특성상 노약자가 많다. 일부 부상자는 아직도 거동이 어렵다. 오 변호사는 “피해자 가족이 원하면 도와드릴 텐데 아직 도움 요청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고 직후 피해자들이 앞다퉈 이사한 점도 공동 대응을 어렵게 한다. 한 당시 거주자는 “불이 나고 피가 낭자한 상황에서 가족이 흉기에 찔려 신음하는 걸 본 사람들이 어떻게 계속 살겠느냐”고 했다. LH 측은 피해자 가족 등 78가구에 대해 이주 등을 지원했다.  ━  다른 동네로 뿔뿔이 흩어진 피해자   이번에 배상 판결을 받아낸 가족의 경우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등이 설득해 사건 발생 2년 7개월 뒤인 2021년 11월에야 소장을 냈다. 재판 과정에서 참변이 일어나기 전 경고음이 무수히 울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재판부는 “경찰이 행정입원 신청을 요청했더라면 전문가의 진단과 치료적 개입이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안 씨를 다섯 번이나 신고했던 이웃 두 명 중 한명은 살해당하고 한명은 상해를 입은 점을 지적했다.   사고 현장은 어떻게 됐을까. 지난달 22일 오후 6시쯤 비극의 현장인 경남 진주의 아파트 단지를 찾아갔다. 불에 탔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안 씨가 방화했던 집에는 조명이 들어와 있다. 다른 사람이 입주한 듯했다.   안 씨가 살던 집의 위층에 올라가 봤다. CCTV의 흔적이 보인다. 안 씨는 사건 몇 달 전부터 윗집 사람들을 괴롭혔다. 자신의 집으로 곰팡이와 벌레를 보낸다는 이유였다. 문에 오물을 투척하는 등 기행을 벌였다. 여러 차례 경찰에 신고했으나 “관리사무소에 도움을 요청해보라”는 등의 대답만 돌아왔다. 경찰 안내에 따라 설치한 CCTV엔 안 씨의 행패가 잡혔다. 그래도 보호를 받지 못했다. 끝내 윗집에 살던 19살 시각장애인 최 모 양이 안 씨에게 살해됐다. 한 이웃은 “앞도 잘 못 보는 아이가 무섭다고 그렇게 호소를 했는데 안 씨가 죽일 때까지 아무도 지켜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인근 파출소까지 걸어가 봤다. 150보 만에 개양파출소에 도착한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 정신 건강을 위한 ‘마음 나누기’ 참여자를 모집하는 게시물이 보인다. 어린이집은 텅 비었다. 2021년 4월에 닫았다고 한다. 안 씨 사고 이후 아파트 분위기 변화가 느껴진다. 사고로 피해를 보았던 집을 찾기는 어려웠다.    ━   “국가라도 나서서 소송 도와야”   당시 주민은 “피해 가족들은 모두 다른 데로 떠났다”며 “대개 다른 임대아파트로 이사했다”고 말했다. 공동 대응할 여건이 안 돼 이대로 시효가 지나갈 듯한 안타까운 상황이다. “국가의 잘못이 인정된 만큼 정부가 적극적으로 피해자들에게 배상 판결 사실을 알려주는 게 맞다”(공공기관 관계자)는 의견도 나온다. 국가배상 판결에도 불구하고 비극은 반복되리란 예상이 제기된다. 언제 어디서 칼부림이 나도 이상할 게 없는 현실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지난 22일 오전 10시쯤 포항지진 트라우마센터 이영렬 센터장을 찾아갔다. 국립부곡병원장을 지낸 그는 안 씨 사건 당시 곧바로 현장 지원을 나갔다. 이 센터장은 “안 씨는 제대로 관리나 치료만 됐으면 이런 일을 안 일으켰을 사람”이라고 진단했다.   이영렬 센터장과 오지원 변호사 사고 직후 그는 안 씨의 치료 이력을 확인했다. 진료 기록에는 안 씨가 위험인물로 변해간 과정이 담겨있었다. 안 씨는 2011년 1월 극도로 위험한 상태로 병원에 들어왔다. 타인을 흉기로 공격했다. 입원 직후 그는 팔과 다리를 결박당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그러나 약 한 달 만에 의료진이 산책을 허용할 정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이 센터장은 “치료를 받으면 빠르게 호전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퇴원 이후에도 기간에 맞춰 병원에 오는 모범 환자였다. 그런데 2016년 7월 진료를 받은 뒤 나타나지 않았다. 이게 위험신호인데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다. 이 센터장은 “마지막 진료일 차트를 보면 이전과 달리 의사에게 상당히 길게 얘기한 사실이 나타난다”며 “이런 모습을 보인 뒤 사라졌다는 건 위험 신호”라고 설명했다. 무차별 살인이 벌어진 건 그로부터 약 2년 9개월 뒤다. 이 원장은 “치료제 복용을 중단해도 약의 효과가 어느 정도는 지속한다”며 “그게 완전히 사라지는 게 18~24개월 정도”라고 설명했다. 안 씨의 이웃 공격 시점이 그 무렵이다. 예고된 참사라는 얘기다. 안 씨 사고 이후 정부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 퇴원 환자를 방문 및 상담하는 지속 치료 지원 시범사업을 시행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흉기 난동을 막기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  얌전한 환자만 입원한 현실   다른 사람을 해칠 위험이 있는 환자가 곳곳에 있는데 현 체계에선 그들을 찾아내 치료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안 씨 사건 4개월 전 서울 강북삼성병원에서 임세원 교수가 환자에게 살해당한 사건과 지난해 8월 분당 서현역에서 차를 몰고 인도로 돌진한 뒤 흉기로 행인을 공격한 최원종 씨도 비슷한 유형으로 분류한다. 전문의들은 당장 떠오르는 위험 환자만 해도 여러 명이라고 말한다.   이 센터장은 “1년 반 만에 나타난 환자가 눈빛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주먹이 날아왔다”면서 “허벅지를 이빨로 깨문 환자도 있다”고 밝혔다. 모두 정상 치료를 받을 땐 잘 따르던 환자들이다.  ━  “40~50대 남성, 70~80대 부모가 책임지라는 격”   이번 소송에 힘을 보탠 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에서도 같은 우려를 제기한다. 조순득 회장은 시대 변화에 안 맞는 보호 의무자제도를 비판한다. 조 회장은 “위험에 놓인 40~50대 남성을 70~80대 부모가 책임지라는 얘기”라면서 “1인 가구가 느는데 혼자 지내는 사람이 약을 제대로 먹는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방치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의 개입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이 센터장은 “조현병 중 타인을 공격하는 성향은 일부에게만 나타난다”며 “이런 환자가 관리에서 벗어나면 극히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그런데도 입원에 제약이 많아 시한폭탄 같은 상태로 방치된다. 이 센터장은 “공격성이 없는 얌전한 환자들만 입원해있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병원마다 진료 기록을 보면 안 씨처럼 위험한 사례를 찾을 수 있고 이들을 집중적으로 관리해 시민 피해를 막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  예방이 위로보다 중요   이번 소송은 국가가 항소를 포기하면서 배상이 확정됐다.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은 유족에게 손편지를 보내 위로했다. 위로보다 중요한 일은 더는 피살자와 유가족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이다.   이번 판결문에 기록된 피살자 금 모 양의 기대여명(통계적으로 산출한 생존 가능 햇수)은 ‘75.58년’이다.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삶의 시간이다. 앞으로도 75년의 인생을 빼앗길 위험은 도처에 상존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경고다. ----------------------------------  ━   "조현병보다 시스템이 더 문제"   백종우 경희대학교 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16일 서울 회기동 경희대의료원 교수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우상조 기자 안인득 씨 피해자 소송을 지원한 백종우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책연구소장(경희대 의대 교수·사진)은 “가장 큰 문제는 조현병 자체가 아니라 빈약한 시스템”이라며 “정신응급만이라도 필수의료로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 단체가 함께 유가족을 지원했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전문의·법률가와 유가족은 물론 정신장애인가족도 같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 임세원 교수 5주기를 맞았다.   "친했던 친구라 아직도 마음 아프다. 위험한 환자는 많다. 선량한 사람인데 병 때문에 살인미수로 치료감호를 받았던 환자가 있다. 약을 끊는 바람에 망상이 재발해 가게에 들어가 주인을 해쳤다."     가장 시급한 대책은.   "자·타해 위험이 있는 경우 치료 결정을 가족에만 맡겨선 안 된다. 현행법에 규정된 응급행정입원이라도 지키는 것이 당장 급하다."  관련기사 식약처 장벽 넘자 심평원 발목… 환자 “죽으란 얘기냐”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강주안의 직격인터뷰] 일본보다 심각한 한국 은둔 청년…부모도 함께 치유해야 [강주안의 시선] 양승태·김명수의 실패를 극복하려면 “제가요? 왜요?” 떠넘기기 선수 된 경찰·검찰·법원[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납골당에 나란히 자리한 이태원 참사 희생 청년들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그리고 두 명만 살아남았다…돈 안 되는 환자들의 비극 [강주안의 시선]강주안 논설위원

    2024.01.04 01:21